김양우 개인전
통근 생활
2022. 06. 17 -
07. 17
변두리에서 뻗은 궤적, 김양우의 묵시적 통근
김양우는 일상적인 통근을 멈춘 지금도, 여전히 통근의 리듬을 타며 이동의 굴레에서 오르내린다. 지리학자 팀 에덴서 Tim Edensor는 “통근의 리듬은 굉장히 다양하며, 교통수단과 특정 비용, 문화적 관행과 사회 통념, 규제 방식, 이동 거리, 거쳐간 공간의 특수성을 포함한 수많은 요소로 형성된다. 뉴욕에서 지하철로, 도쿄에서 신칸센으로, 캘커타에서 자동차로 여행하는 통근자들은 각기 다른 리듬과 경험에 사로잡힌다”고 썼다. 김양우는 〈통근 생활 Commuting Lives〉 프로젝트를 “우리가 매일 겪는 도시에서의 개인이 이동하는 통근 거리와 시간에 대한 작품”이라고 소개한다. 작가의 관심사는 경기도와 서울을 오가던 개인적인 통근으로부터 출발하여, 아시아 곳곳에서 주변과 중심을 오가는 통근자들까지 차츰 확장해간다. 2022년 여름의 길목에서 그는 네 명의 통근자들이 만들어내는 각기 다른 리듬을 한데 모은다.
《통근 생활》 @ 합정지구, 변두리들을 빨아들이는 수도
전시공간 합정지구가 자리 잡은 합정역 일대는 서울 이동의 주요 거점 중 하나이다. 합정역은 서울 서북부 지대에서 강남으로 넘어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환승구간이자, 인천과 일산, 파주 등 경기 서부에서 출발한 빨간 버스들과 광역급행버스들의 하차 지점이다. 공항리무진 노선에도 속하며 공항철도가 정차하는 홍대입구역과도 가깝다. 합정은 서울 외곽과 경기도의 통근자들을 서울 도심부로 끌어당기는 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합정지구에서 열리는 김양우의 개인전 《통근 생활》은 주변에서 중심으로 흘러 들어가는 통근자들의 숙명 그 자체와 닮아있다. “교통 흐름은 도심 근처에 있을 때 응고된다”는 에덴서의 표현처럼, 《통근 생활》은 지금 각자의 변두리에서 각자의 중심으로 흐른 끝에 합정지구 안에 엉겨 굳어진다.
전시장은 통근 행위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며, 어떤 통근 공간을 떠올리게 한다. 전시는 지도를 펼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합정지구로 들어서는 코너의 한쪽 공간의 통유리에는 우리가 곧 마주할 네 명의 통근자를 소개하는 짧은 메모가 적혀있다. 유리창 너머 짙은 푸른색 벽에 이들의 통근 경로와 목적지가 조각조각 걸려, 〈김양우, 로박림, 히노하라 요시카즈, 통라 창사웅의 통근〉이 한 장의 모험지도처럼 펼쳐진다. 계속해서 1층의 전시공간은 통근의 다채로운 리듬을 연주하는 파편들로 즐비하다. 각국 통근자들이 사용하는 인터넷 지도 플랫폼에서 따온 구불구불한 경로들이 〈1: 100,000〉으로 축소된 채 박제되었고, 이동하는 시야에 맞춰 변화하는 도시의 움직임들은 겹쳐진 채로 〈속도의 풍경〉을 이룬 끝에 멈춰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지구 맵〉에서 통근 위치들이 새겨진 지구는 천천히 돌아가는데 천장에 닿은 디스플레이는 하늘 끝처럼 멀다. 타인의 통근이 얼마나 까마득한지 실감하고 있자니, 등 뒤에서 아스팔트 긁는 소리가 무더운 여름 통근의 불길함을 예고한다. 시선을 돌리면 통근에 대한 김양우의 생각 파편들과 프로젝트에 참여한 통근자들의 흔적들이 한가득 펼쳐진다. 통근 거리를 재단하려는 계산 도구와 흔적들, 교통수단 모형, 일본의 승차권, 싱가포르 공장을 연상시키는 금속 조각들, 방콕의 랜드마크와 청소 노동자의 머리핀 등등. 이토록 다양한 파편을 스쳐 가며 지하로 향하는 전시장 문을 열고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움직임은, 도시 랜드마크와 길바닥 아스팔트, 역사 안 전광판과 가게들로 뒤섞인 풍경을 지나 지하철을 타기 위해 개찰구를 통과하는 걸음과 닮아있다.
지하 전시장의 문을 열면 익숙하고 낯선 통근 풍경과 소음들이 나타난다. 한국과 말레이시아-싱가포르, 일본, 태국에서 추적한 통근 생활이 마름모꼴을 이루며 서로 대칭되고 관계 맺는다. 초대형 프로젝터로 영사되진 않지만, 커다란 디스플레이가 코앞에 놓여 통근의 강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카메라의 줌인과 줌아웃에 따라 화면 속 인물들은 실제로 통근을 하며 마주하는 사람들과 같은 실물 크기처럼 다가오기도 하는데 좌석과 벽까지의 여유 공간이 넓지 않아 꼼짝달싹 없이 통근의 블랙홀 안에 갇힌 기분이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군중과 도시 풍경 너머로 오직 녹색 탈출등만이 움직이지 않고 번뜩인다. 탈출등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한다. ‘대체 언제쯤 이 지긋지긋한 통근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숫자라는 껍데기 너머, 예술로 통근자들을 조우시키기
통근이 언제나 고단하거나 누구에게나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출퇴근의 역사 Rush Hour』 저자 이언 게이틀리 Iain Gately에 따르면 서구 1세대 통근자들에게 통근은 고된 노동에서 벗어날 기회이자 자신이 사는 세계를 개조할 자유였다. 발달된 교통이 한 사람의 일터와 쉼터를 효율적으로 분리시키면서, 보상이 충분히 보장된 직업과 쾌적하고 아늑한 주거지를 누릴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게이틀리는 통근이 여러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이동의 자유를 제공하며 낙관주의가 가득한 “최상의 절충점”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현대 아시아에서 통근은 절충점일지언정 ‘최상’이나 ‘최선’이라는 형용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김양우의 작품 속 통근자들은 ‘이동의 자유’를 누리기보다는 이동을 버텨내는 모습이다.
프로젝트의 시작이 되는 〈67.32km〉(2018)는 서울에서 화성을 오가는 작가 본인의 통근길을 기록한다. 지하철에서 지하철로, 또다시 지하철에서 버스로 몇 번의 환승과 걸음걸음이 서울의 야경과 뒤섞인다. 〈67.32km〉에는 뉴욕이나 홍콩에 비견될 정도로 아름답다는 서울의 야경이 그대로 담겨지지만, 퇴근길 면면과 결합하여 이미 체화된 피로로 다가오게 된다. 여기 합정지구에서 전시를 보는 우리들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걸 넘어서 하루 일정을 끝낸 뒤 겪어야 할 예고편이기도 하다.
이후 〈통근 생활〉 프로젝트는 일본과 말레이시아-싱가포르로 이어진다. 이 장소들은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여행지인데, 고층건물과 야경, 아스팔트 도로라는 도시들의 공통적인 요소들로 인해 낯익고 서로 다른 통근방식 덕분에 낯설다. 〈44.6km〉(2018)는 말레이시아 조호르바루에 거주하며 싱가포르 금속공장에서 일하는 로박림의 통근을 기록한다. 싱가포르의 임금은 말레이시아보다 세 배 가량 높고 거주 렌트비는 다섯 배 정도가 높다. 그가 말레이시아에서 싱가포르로 향하는 오토바이 행렬의 일부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88.2km〉(2019)에서는 퇴직을 앞둔 80대 임상학자 히노하라 요시카즈의 퇴근길과 도쿄에서 군마로 흘러가는 도시 풍경이 교차된다. 국경을 넘거나 현과 현 사이 도시를 몇 개씩 뛰어넘으며 두 통근자는 긴 거리를 버텨낸다.
가장 최근 작품인 〈7km〉(2022)는 한 도시 내에서 중첩되는 통근을 다룬다. 세계가 합의한 팬데믹 끝자락에 촬영된 이 작품은 도시 혹은 국가 경계를 오가는 그전 작품들과 대비된다. 그럼에도 〈7km〉는 변화가 아닌 확장이다. 근대적 발명품인 ‘통근’이 이동의 자유를 상징하게 된 데에는 도시에 속박된 자들의 쾨쾨한 구역에서 벗어나 안락한 사적 공간을 누릴 기회를 바탕으로 한다. 뒤집어 생각하면 도시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즉 물리적 거리나 행정구역으로 재단했을 때는 변두리에 속하지 않지만 사회적이거나 환경적인, 나아가 시각적인 의미로서는 변두리에 귀속된 존재들이 떠오른다. 이러한 변두리에서의 생활공간 역시 일터와 구분되기에 통근을 피할 수 없다. 〈7km〉의 주인공 통라 창사웅이 그 존재들 중 하나다. 창시웅은 방콕의 지하철 버스인 BRT에서 일하는 청소노동자로, 방콕 노동계급의 장년층 여성들이 흔히 그러는 것처럼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통근한다. 그는 방콕 도심 밖을 벗어나지 않지만,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거주지는 변두리 작은 방이다. 〈7km〉에서는 창사웅이 노동하는 모습과 공간이 드러나면서, 그가 일하는 역사가 다른 이들에겐 통근을 위한 경로로 기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통근자들이 매일매일을 낯선 신체들과 만나 일정한 공간을 공유하듯, 싱글 채널로 선보였던 통근 영상들은 지하 전시공간 안에서 4채널로 조우한다. 서울의 익숙한 출퇴근은 더욱 익숙한 것으로 끌어올려지고, 낭만적인 여행지였던 일본과 말레이시아-싱가포르, 태국의 밤은 낯섦과 낯익음이 뒤섞인다. 이따금 리듬을 타고 울리는 지하철 안내음과 정신없이 빙글빙글 녹아드는 현아의 노래 가락이 친밀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로써 네 명의 낯선 타자들을 우리와 비슷한 노고를 공유하는 통근자로 다가오고 자신들의 삶에 다가가게 한다. 통근연구자 데이비드 비셀 David Bissell이 던졌던 질문이 떠오른다. “통근 자체가 어떻게 그들의 가치를 바꿀 수 있는 방식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재고하게 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일과 관계, 그리고 공동체가 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재평가하게 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질문되는가?”
김양우가 수행하는 다양한 통근의 조우는 어떤 통근이 보다 더 힘겹다는 것을 비교하거나 ‘통근 생활’을 개선하기 위한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비셀의 지적처럼 해결책 제시에만 집중한다면, 변화는 정치적 의지나 재정적 여유가 동반된 어떤 이상적인 ‘미래’에 그 가능성을 맡겨둔 채 ‘현재’는 언제나 부족한 상태로 남아버린다. 변화는 진행형이다. 2022년, 김양우에게 화성과 서울을 오가는 이동은 비일상적인 여정이 되었다. 히노하라 요시카즈와 통라 창사웅은 은퇴하여 각자의 고향에 자리 잡았다. 로박림은 코로나-19가 극심하던 무렵 싱가포르로 이주했다가 다시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간 참이다. 누군가에게 통근은 과거가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과거의 조각이 되어 현재에도 그 일부를 떠안는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굴곡이 반복되는 현재진행형이다. 김양우의 《통근 생활》은 우리가 통근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연결되는, 그리고 앞으로도 이어나갈 궤적을 그려 나가면서.
_배진선(독립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