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채 개인전
A로부터
2022. 07. 22 -
8. 21
열화된 현실 이미지와 회화적 복구
안소연
-전시 제목에서 A는 작업의 소재가 된 익명의 이미지들을 지칭합니다.
익명의 이미지, 그것은 인터넷이라는 컴퓨터 네트워크 통신망에 표류하는 이미지 정보 중 하나로서 불확실성을 가졌다. 그는 이미지 앞에 “익명”이라는 단서를 넣어, 그 기원[출처]과 실체[사건]에 대하여 알 수 없음을 분명히 말해준다. 말 그대로, 그것은 “이름 없음”이 아니라 “이름 숨김”의 정황을 강조하면서, 은폐되거나 가리워져 도무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에 대해 진실하게 밝힌다.
불확실성을 진실하게 밝힌다, (수상쩍은 의미심장함 때문에 여기서 호흡을 한번 멈추게 하는) 이 문장은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아 도무지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을 진실하게 말한다는 것으로 해석돼, 어차피 모순인 것을 알면서도 (그 앎 때문인가) 불확실성의 무지에 대한 괜한 믿음이 생길 지경이다. 이를테면, 불확실성 때문에 선명하게 볼 수 없음과 정확하게 알 수 없음에 대한 자각은 비로소 “익명의” 대상에서 생겨난 수상한 모습과 거리낌 없이 마주하게 한다. (그것이 숨겨진 것의 정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는 “이미지”를 찾는다. 가본 적 없는 장소와 살아보지 못한 시간들과 마주친 적 없는 사람들의 이미지다. 그것은 낯설지만, 오래되지 않은 과거의 시공간이 (시대착오적으로) 그의 삶과 불확실하게 맞닿아 있는 정황을 보이며 그에게서 기이한 상상력과 동질감을 일으킨다. 블랙홀처럼 거대한 인터넷 네트워크에서 떠돌다가 어떤 시점에 다다라 정체된 것처럼 보이는 이미지들에 접속해, 그는 하나의 검색어 밑에 정렬되어 있는 이미지들을 새로운 폴더에 모으기 시작했다. 이때, 그가 특정한 조건은 자신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어 그 경험을 공유할 수 없(었)다는 데 있다. 경험하지 못한 현실, 그는 그것을 이미지의 조건으로 삼아 더 이상 진실성을 물을 수조차 없는 익명의 정보로 규명한다.
검색어는 “1980년대”였고, 그는 자신의 현실과 (직접) 대치해 있는 비현실적인 시공간의 이미지에 주목했다. “80년대는 나에게 이미지로만 경험 가능한 시대로, 내용과 맥락을 알 수 없는 낯선 이미지들이 (…) 비현실적 상상을 자극하는 점이 흥미로웠다”고 그는 말한다. 이로써 자신의 경험 바깥에 놓여 있는, 즉 자신의 현실과 대치해 있는 과거의 시공간에 대한 불확실성을 이미지에 대입하여, (현실에서의) 비현실적인 상상을 가정하는 일련의 절차들을 만들어 갔다. 왜 1980년대였을까 하는 물음이 계속해서 맴돌았지만, 내가 미리 생각했던 것만큼 특별한 의미를 가진 정황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익명의” 조건을 충족하되 (자신의 현실과 맞닿아 있는) 비현실의 영역에서 이미지로 표류하는 시공간의 잔해를 찾고자 했을 테다.
동시대 이후, 포스트 디지털 혹은 포스트 인터넷 경험이 남긴 시공간적 방향 감각의 오작동 같은 것, 그러한 이미지 정치학의 여진이 흐릿하게 감지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익명의 이미지는 김민채의 작업에서 논의의 대상이기 보다는 회화로 변환되기 위한 소재로 등장한다. 결론을 미리 말해본다면, 그는 “이미지의 비가시성”에 주목해 회화적 보기의 가능성을 실험한다.
- 어딘가 낯섦을 느꼈고, 때로는 실재 같지만 마치 연극처럼 연출된 장면을 보는 듯 했습니다.
우리가 저 그림 속 형상들과 그림의 제목을 빠르게 겹쳐서 훑어볼 때, 그는 연극적인 장면들이 표출하는 서사를 직접 다루는 듯한 인상을 준다. ⟪A로부터⟫(2022)에서, 채도가 낮은 분홍색 계열로 화면 전체가 통일된 색조를 띤 김민채의 그림은, 마치 무대 위의 연극이나 스크린 속 영화의 한 장면을 정지시켜 놓은 회화 연작 같기도 하다.
이러한 클리셰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동질감을 자아내는 그의 회화 속 형상들에서는 역설적이게도 좀처럼 서사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아 당장에는 (예상과 달리) 곤혹스러움을 준다. 예컨대, <어둠이 가라앉는 시간>(2022)을 보면, 헝클어진 폐허의 풍경 속에 십자가 묘비와 유령 같은 인물 형상이 수수께끼처럼 세워 있어 화면 가득 낯선 장면을 그려내고 있다. 죽음을 표상하는 장소 위에서 비닐인지 천인지 모를 투명한 베일을 뒤집어 쓴 인물(들)은, 그 육체가 하나인지 셋인지 알 수 없음을 내비친다. 한 사람의 연속 동작을 그렸는지, 한 사람의 육체에서 벌어지는 영혼의 이탈을 표현하려 한 건지, 아니면 세 사람이 하나의 형상 안에 묶여 분리 불가능한 형태로 그려진 것인지, 답 없이 수수께끼 같은 상상만 계속된다. <어둠이 가라앉는 시간>에서 감지할 수 있는 것은 “형상”뿐이다. 색조차 가늠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화면에서는, 십자가 형상과 십자가 형상 아닌 것, 인체 형상과 인체 형상 아닌 것, 하늘과 하늘 아닌 것을 가늠하기 위해 강박적인 시선이 계속해서 그 표면을 훑고 지나갈 것이다.
김민채는 구체적인 사건과 정황을 갖고 있는 현실의 장면들이 하나의 이미지로 포착돼 여러 키워드의 알고리즘에 따라 표류하는 인터넷 환경의 불확실성을 경험하면서, 이를 회화의 대상으로 옮겨올 구실을 찾는다. 그것은 우연한 사건에서 비롯돼 그의 작업 전반에 걸쳐 이미지와 회화의 관계를 탐구하게 하는 중대한 조건으로 작용한다. 예컨대, 인터넷 뉴스에서 내용을 접하기 전에 보도 사진을 먼저 보고 그 이미지에 대한 즉흥적인 상상이 일어났던 몇몇 경험을 토대로, 김민채는 구체적인 사건에 다가가려 하지 않고 이미지만을 수집해 그것이 함의하는 서사 대신 그것이 표출하는 형태에 주목해 보기로 한다. 이러한 조건의 당위를 명확히 하기 위해, 그는 자신이 직접 경험해 본 적 없지만 자신의 현재와 어느 정도 가까이 인접해 있는 과거의 시공간을 특정했다. 그렇게 해서 확정된 이미지 검색어가 “1980년대”였던 거다.
1980년대라는 임의의 시공간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그동안의 시간적 낙차와 인터넷 네트워크에서의 표류로 인해 서사도 떨어져 나가고 해상도도 흐려져 비현실적으로 열화된 이미지로서 현존하게 됐다. 김민채는 그러한 이미지가 태생적으로 지닌 낯섦을 발견하고, 현실에서 파생된 실제적인 감각을 보유한 채 마치 현실을 모방하고 있는 “가짜” 현실의 이미지로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현실에 대한 것”이지만 현실이라고 하기에는 스스로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은, “진짜” 현실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떨어져 나간 이미지들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다가갔다. 그는 현실에 대한 것으로서 낯섦을 표출하는 이미지들이 그의 현실 바깥 시공간에 제 원형을 가지고 있어 일종의 모조 현실처럼 연극에서의 “연출된 장면”일지도 모를 거라는 생각을 충분히 이어갔다.
<우매함을 위한 습성 훈련>(2022)을 보면, 그의 말대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정황을 가늠케 한다. 김민채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하나의 키워드에 연결되어 있는 이미지들을 찾아 수집했는데, 모호하고 불확실한 이미지들에서 그가 선별했던 기준이 바로 그거였다.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장면. 이 “어떤 일”이라는 것은 구체적인 무엇이 아니라 이미지의 익명성을 부각시켜주는 “숨겨진 것” 혹은 “가려진 것”을 함축한다. 그래서 도무지 알 수 없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수상한 정황을 그는 1980년대 이미지를 선별하는데 우선하여 고려한 셈이다. <우매함을 위한 습성 훈련>의 경우, 얕은 단상 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과 그 앞에서 그들을 향해 서 있는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떤 관계 안에 놓여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은 볼수록 더해진다. 그러한 정황 속에서 의연하게 김민채가 주목한 것은 그 서사에 대한 기다림이 아니라 화면을 구성하고 있는 일체의 형상들이 그 서사의 공백을 드러내는 순간의 모습이다.
-형상을 지우거나 대신 붓 자국을 남기기도 합니다.
-본래의 형태로부터 조금 더 벗어나도록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우매함을 위한 습성 훈련>처럼, 김민채는 검색을 통해 수집한 이미지를 특유의 절차를 거쳐 회화로 변환한다. 비물질적이며 추상적인 형태로 잔존하는 디지털 이미지를 가져와, 그는 이미지의 불확실성을 캔버스 위에 회화적 기술로 재구축하려는 시도를 모색한다.
흥미롭게도 <우매함을 위한 습성 훈련>은 그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화면 전체에 걸쳐 가로선이 반복적으로 나타나 있어 회화와 이미지 사이의 감각을 공유하고 있다. 그는 1980년대라는 검색 알고리즘에 엮여 인터넷 네트워크의 블랙홀을 표류하는 이미지를 포착하여, 더 이상 서사도 없고 선명하지도 않은 채도와 형태를 가진 열화된 이미지들의 위기에서 회화적 상상을 도모한다. 이미 (데이터 상의) 종결된 서사에도 불구하고 불확실한 형상에서 회화적 보기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는 물감이 마르기 전에 빠른 속도로 낮은 채도의 밑색을 칠해 놓고, “~같은” 혹은 “~만한” 형상에 대해 끊임없이 상상하며 이미지를 회화로 변환하기 위해 그리기와 지우기를 반복하며 회화적 절차들을 꾸려나간다.
<체리1-4>(2022) 연작은 ⟪A로부터⟫에서 익명의 이미지에 대해 회화적 접근을 모색하는 또 다른 맥락을 보여준다. 수집한 이미지 중에서 서사로부터 떨어져 나온, 게다가 저화질의 해상도로 그 실체 또한 불확실한 것을 골라 그 형태에만 집중한 김민채는, 이미지의 비가시성을 극단적으로 키워냈다. 그가 채도가 낮은 분홍색으로 화면 전체의 톤을 맞추는 이유는 그 대상이 지닌 색의 정보 마저 지워 특정 장면과 분위기 마저 소거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흐릿함, 일종의 그런 이유다. 그는 수집한 이미지를 캔버스에 그림으로 옮기는 과정에서도, 그렸다가 다시 지우거나 그 흔적만 흐릿하게 남기는 경우도 다반사다. “형상을 지우거나 대신 붓 자국을 남기기도” 하면서, 그는 이미 정체되어 버린 이미지의 실체를 재현이 아닌 회화적 제스처와 공명하게 한다.
<체리1>에서 <체리4>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이미지는 더 크고 가깝게 확대되면서 저화질의 해상도로 열화되어 버리고 마는데, 김민채는 일련의 이미지가 훼손되는 절차를 좇으면서 그리기와 지우기, 재현과 추상, (회화적) 평면과 표면 등을 넘나들며 회화 속 대상에 대한 보기의 가능성을 열거한다. 그것은 “체리”라는 형태에 다가가는 그리기의 행위가 아니라 “체리”라는 형태로부터 점차 벗어나 “익명의” 보기로 시선을 이끈다.
-정확한 설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사람이 여기 있다’ 정도로 인물을 등장시키려고 했습니다.
<타락천사>(2021-2022)는 두 명의 인물이 나란히 앉아 담배를 피는 장면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어떤 사건의 전말을 함의하기 보다는 “낙하하는” 이미지들처럼 현실에서 모호함에 대한 시각적 유대를 나타내는 기호처럼 작동한다. 흐릿한 이미지들에서, 그 (타락한) 흐릿함이 현실의 선명한 의도들을 지워내고 언젠가 (가까운 미래에) 감추어진 것들과 연대하리라는 예언을 말해주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