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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 개인전
네가 내러티브
NEGA-NARRATIVE

2022.9.2 - 10.1

그 사진ㅡ죽지 않는 계단

함성호(시인, 건축가)

빛은 물리학자가 아닌 어린아이에게도 신비였다. 방과 후 엄마가 계시는지 열어본 부엌에는 살창으로 부챗살처럼 퍼져 들어오는 빛이 엄마의 부재를 알리곤 했다. 어느 날에는 방문 틈으로 들어온 빛이 바닥에서 이상한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로 아롱거리고 있어 자세히 보니, 세상에, 바깥의 움직임들이 아주 작은 크기로 영사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빛을 더듬어 가다 그만 방문을 열어버렸다. 열지 말아야 할 문을 연 대가로 그 영상은 사라져버렸다. 나는 다시 그 현상을 재현하려고 했지만, 그 후에도 우연을 통해 몇 번 같은 현상을 목도한 것이 다였다. 나중에야 나는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알고 있었던 카메라의 기본 원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빛을 물질에 고착시키는 방법이 나오면서 사진이 등장한다. 초기 사진은 8시간 이상 노출해야 겨우 대상을 붙잡을 수 있었다. 8시간 동안 사진가는 뭘 했을까? 사진의 역사는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그 8시간이 사진과 상관없다고 여기거나 그 시간 동안 사진가가 사진과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것은 함의(connotation)는 있지만 지시(denotation)가 없는 이야기가 아닐까?

  이제 풍경이 문제 될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문제는 풍경이 아니다’라는 측면에서일 것이다.1)

  우리말의 관용구에서 사진은 ‘찍는다’는 말과 결합한다. 점을 찍다, 꿀을 찍어 먹다, 벽돌을 찍다, (분명히 가리켜서) 찍다와 같은 예들이 ‘찍는다’는 관용구로 먼저 있었고 우리 생활에 사진이 들어오면서 서술어의 기능을 하는 동사(용언)로 같이 자리 잡았다. 한국어에서 ‘찍는다’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뾰족한 것으로 무엇을 묻히거나 찌르는 행위와, 묻혀서 다른 대상에 좁고 작게 자국을 남기는 행위를 같이 가리킨다. 이때의 자국은 물리적인 것으로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나의) 마음을 너나 그것에 두고 나만 간직하는 행위다. 이 일방적인 방향은 사실 ‘찍는다’는 행위 이전에 이미 너나 그것에 내 마음이 움직였다는 전제가 있다. 셋째는, 일정한 틀이나 생각을 가지고 너나 그것을 만드는 행위다. 여기서 틀은 내가 만든 것일 수도 있지만 이미 만들어진 것일 수 있다. 더군다나 ‘만든다’에는 나와 너, 그것 사이에 어떤 마음의 작용도 없다. 만약에 그런 작용이 있다면 우리는 ‘찍는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럴 경우 ‘찍어내다’는 굉장히 기계적이고, 그것을 사람에게 적용할 때는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또 그것이 마음의 작용이라면, 어떤 것으로 인해 마음에 새겨지는 일정한 틀이나 모호한 틀을 말한다고 할 수도 있다.

  주어 중심 언어인 인도-유럽어에서는 주어와 서술어 사이에 긴밀한 문법적 관계가 이루어지므로 주어는 서술어의 의미적 논항論項이어야 한다. 따라서 주어와 목적어가 자연스럽게 구분되고 각자 독립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진’과 ‘사진을 찍다’는 분명히 다른 말이다. 한국어도 마찬가지 분석이 가능하긴 하다. 그러나 주제 중심 언어인 한국어에서 ‘사진’이라는 단어에는 ‘사진을 찍다’는 행위가 따라간다. ‘사진’이 단순히 ‘사진을 찍은 결과물’이 아니라 ‘사진을 찍는 행위’를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 “너는 밥을 먹었니?”라는 문장은 “밥 먹었니?”로도 충분하며, 그것은 다시 “밥은?”이라는 말로도 가능하다. 한국어는 주어가 생략되거나 불필요한 말이 아니라, 교착어의 특성상 어떤 단어든 주어로도 목적어로도 쓸 수 있다. 같은 말이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쓰이는 게 아니라, 상황을 서술어로 작동시킨다. 외출하고 돌아온 아내에게 남편이 “밥은?”하고 물으면 “밥은 먹었느냐?”는 의미고, 외출에서 돌아온 아내가 집에 있는 남편에게 “밥은?” 하고 물으면 “밥은 지어 놓았느냐?”는 의미다. 사진이라는 단어에 이미 사진을 찍는 행위가 들어앉아 있다는 말은 위에서 얘기한 ‘찍는다’의 세 가지 의미가 사진에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박영선의 사진은 찍지 않는다. 이 문장은 사진을 찍는다는 측면에서 문제적이다. 박영선은 사진을 찍지 않는다가 아니라 박영선의 사진은 찍지 않는다란 무슨 뜻인가? 분명 박영선은 사진을 찍었다. 그 결과물로 사진이 있다. 그 사진은 사진을 보는 우리에게 어떤 인상으로 다가와야 한다. 그러나 박영선의 사진은 우리를 찍지 않는다. 박영선이 찍은 사진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무엇을 찍었고, 어떻게 구도를 잡았고, 색채가 어떤지, 하는 객관적인 사실들뿐이다. 박영선의 사진은 우리에게 어떤 ‘바라봄’을 요구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사진을 본다는 행위는 무엇일까? 첫째, 무엇을 본다. 우리는 사진작가가 찍은 대상(피사체)을 본다. 둘째, 왜 찍었을까? 생각한다. 우리는 하필 그 대상이 왜 사진작가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를 생각한다. 셋째, 앞의 두 가지를 통해 작가의 의도를 알아내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의 세 가지와 그 외 자의적 해석을 통해 논리적인 정합성을 만들어간다. 이 단계에서 앞의 세 가지는 유지될 수도 있고 감상자의 마음에서 떨려나갈 수도 있다. 우선, 사진의 대상은 다른 예술과 달리, 예술가에 의해서 더해지거나 덜해질 수 있는 변형 가능한 대상이 아니다. 만약 기계적 조작을 통해 가능하다 하더라도 작가는 그 결과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우리가 보는 사진의 대상은 순수하게 빛의 문제다. 그다음, 왜?라는 문제에서, 사진을 본다는 것은 사진을 하나의 문장으로 인식한다는 말이다. 작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사진의 대상을 찍었을까? 그리고 이 질문은 곧바로 사진의 의미화 작업을 우리의 인식 속에서 수행하게 된다. 작가가 대상을 찍은 빛의 자국, 즉 사진은 사진을 본 주체에 의해 개인적인 문화, 경험, 역사 등과 복합적으로 섞이고 재논리화되면서 사진을 통과해 사진을 확장하고 우리의 인식의 지평을 확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진의 전통에서 박영선의 사진은 어긋난다. 박영선의 사진은 블랙홀이다.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오는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사진은 사진을 바라보는 순간 텅 빈 구멍이 된다. 거기에 인왕산이 찍혔든, 바닷가 풍경이 찍혔든, 그 사진은 다시 우리를 찌르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침묵이다. 정말 박영선의 사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또 다른 시간》에서 시간차를 가진 한 쌍 혹은 두 쌍의 사진들은 그 자체로 뭔가 말을 거는 것 같지만 그것은 <인왕산과인왕산과>에서처럼 한-두 쌍의 사진틀 바깥의 시간을 구성한다. 《인왕산과인왕산과》에서는 제법 많은 인왕산의 사진들이 걸렸지만 그건 박영선이 좀 친절해진 경우다. 박영선의 이미지는 사진에서, 사진의 세부에서 뿜어져 나오지 않는다. 그의 사진은 세부라고 말하기 쑥스러울 정도로 지극히 평범하다. 아무것도 세우지 않는다. 이번 전시 《네가네러티브 NEGA-NARRATIVE》에서는 제품의 포장지를 아예 사진기로 찍지 않고 인화기로 구워서 내 놓았다. 그 결과 오히려 사진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상 그렇다. 그 내용에는 역시 사진에서 제외된 알맹이, 즉 쓸모 있는 제품들은 사진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박영선이 자신의 사진에서 내세우는 것들은 모두 사진 바깥에 있다. 그래서 박영선의 사진은 행위다. 찍는 행위가 아니라 찍지 않는 행위다.

 


  사진기와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과학과 이성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소유하려는 인간의 오랜 ‘탐욕’의 역사를 떠올린다. 사진기는 칸트의 순수이성이 물질화된 기계 이성이다. 사진을 찍는 행위 속에서 ‘생각하다’와 ‘보다’라는 말은 동의어가 되어버린다.2)

  사진에 대한 서구철학의 논의는 사르트르의 이미지론에서 본격화된다. 사르트르는, 이미지에 대한 서구의 전통이 데카르트, 흄, 베르그손 등에서 보듯이 이미지를 사물화하여 하나의 물질로 간주하는 오류에 빠졌다고 보았다. 이미지는 관념에 비해서 불완전하지만 좀 더 생생하다. 서구철학은 그런 생생한 이미지의 작용을 좀 더 물질에 가까운 것으로 보았다. 사르트르는 후설 현상학의 자장 안에서 이러한 전통에 거리를 둔다. 그는 ‘상상하는 기능’, ‘상상하는 태도’에 주목하며 상상의식은 (지각의식과 다르게) 부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유사 표상물’을 통해 겨냥하며, 이 유사 표상물을 후설을 빌어 ‘아날로공(analogon)’이라고 명명한다. 상상의식이 그 대상을 형상화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아날로공 덕분이라는 것이다. 아날로공이 없다면 나의 의식은 그 대상을 상상할 수 없다. 즉 아날로공이란 “부재할 수밖에 없는 상상의식의 대상을 비슷하게 재현해낸 물적 표현매체나 대리물”을 뜻한다. 이에 따르면 사진은 대상과의 유사성 정도가 가장 높은 아날로공이며 그로 인해 대상의 상상력을 오히려 억압한다. 역시 사진을 본다는 것은 대상을 상상하는 행위다.


  사르트르가 이미지를 대상의 무화無化, 부재를 상상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면, 바르트는 대상이 과거의 한때 ‘존재했었음’을 강조한다. 사진에 있어(있는) 대상의 부재가 지금의 슬픔을 낳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진은 대상의 존재를 다시 현실에 ‘부활’시킨다. 과거와 현재가 기묘하게 교차하는 이 지점을 바르트는 사진의 ‘광기(lunacy)’라고 불렀다. 바르트는 죽은 어머니의 다섯 살 때 사진을 보고 사진 속에 존재하는 그녀가 현실에 없다는 것을 경험한다. 물론 사진 속의 다섯 살 소녀를 바르트는 본 적이 없다. 본 적이 없는 그 소녀가 결혼을 해서 자신을 낳고 엄마가 되어 죽어서 지금 부재한다는 슬픔, 사진은 과거의 사건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미래의 사건이라는 치명적 진실을 폭로하고 있었다. 이것이 디테일이다. 사진에 나타난 상의 세부로 드러나는 공간적 푼크툼과 나뉘는, 죽음의 확인으로서의 시간적 푼크툼이다. 푼크툼(punctum)은 한국어의 ‘찍는다’는 말의 의미와 비슷하다. 라틴어에서 푼크툼은 스투디움(studium)과 비교되는 말이다. 스투디움이 ‘찍는다’는 한국어의 세 번째 의미 중 기계적 틀로서의 ‘만들다’와 연관이 있고 라틴어에서는 사회적으로 코드화된 요소로 훈련이나 교육에 의해 익숙해진 것을 의미한다면, 푼크툼은 코드화되지 않는 요소이며 콕콕 찌르고 가슴을 죄여오는 우발적 경험을 말한다. 우리는 사진을 스투디움의 경험에 의해서 보지만 어느 순간 그것은 스투디움의 틀을 깨고 전혀 다른 틀을 만든다. 푼크툼의 라틴어 의미 그대로 ‘찔린 상처’, ‘작은 구멍’, ‘작은 반점’, ‘작은 금’과 같은 의미가 이 경험에 적합하다. 바르트가 한 소녀의 사진을 보았고 그것이 어머니의 과거 모습이라는 것을 안 순간, 바르트는 무엇인가에 찔리고, 스투디움에 금이 가는 경험을 한 것이다.

  박영선의 사진에서 푼크툼은 없다. 몇몇 사진을 제외하곤 어떤 감정도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무미건조한 것이 박영선의 사진이다. 슬프지도 않고 암울하지도 않다. 유머는 아예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그의 사진에서 발길을 돌려 거리로 나왔을 때 우리는 비로소 거기에서 박영선의 사진을 만난다. 거기엔 결정적인 순간도 없고 충격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거리에서 박영선의 사진 바깥을 만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박영선의 사진은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진이라는 행위’로 불러야 한다. 따라서 박영선 사진에서 과거란 없다. ‘존재했었음’도 없다. 왜냐하면 존재하니까. 모든 게 지금의 얘기다. 왜냐하면 그 행위는 사진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가 《네가, 내러티브》에서는 슬며시 서구 인식론의 전통 속으로 스며든다. 그는 관념의 무당이 되어 거울과 방울과 칼을 들고 사진의 이미지론으로 잠입한다.


  서구인식론과 시각중심주의, 주어중심주의 언어는 정확히 삼위일체다. 인식론은 ‘보는 것처럼’이라는 시각중심주의에서, 그리고 그것에서 주어중심주의 언어가 파생된다. 근대는 이 삼위일체의 신학이다. 그리고 이 신화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특이한 감각론에서 비롯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감각이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능동적인 것으로 보았다. 피타고라스는 청각을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따뜻하고 섬세한 공기의 흐름으로 보았고, 시각 역시 눈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빛이 뿜어져 나와 그 빛이 대상을 감싸고 만져서 파악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사실이 어떻든 간에 그들은 시각이 다른 감각들보다 시간적 흐름을 덜 드러내기 때문에 고귀한 감각으로 여겼다. 역동적인 변화보다는 정적인 것을 더 높게 평가하고, 덧없는 외양보다는 고정된 것이 더 본질적인 것으로 가치 우위에 섰다. 바라본다는 것은 대상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대상과의 거리를 두면서 중립적 객관적 자세를 취한다는 말이다. 데카르트가 운동을 물체의 본성이 아니라 우연의 양태로 본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파르메니데스, 피타고라스, 플라톤 등, 그리스 철학자들이 불변적인 것을 이상화하려는 시도를 이어간 서구철학의 시각중심적 인식론은 데카르트에 와서 수학적 세계관으로 나타난다. 박영선에 따르면, 플라톤적(기하학-수학적) 전통을 내면화하고 있는 데카르트에게 시각적 이성으로서의 코기토가 대상에 대한 명료한 인식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그 대상은 고정되어 있어야 하며, 따라서 움직임은 인식의 수준에서 배제된다. 이러한 데카르트적 인식 주체-대상 관계의 고정성은 ‘고정시키고자 함’으로 확장된다. 바로 이러한 고정화에의 지향이 가변적 세계를 필요한 부분만 잘라내어 이미지로 고정시키는 사진의 형이상학적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진사의 초기에 머이브리지나 만 레이가 인간의 눈으로는 지각할 수 없었던 사물들의 움직임을 고속촬영 기술로써 포착해낸 것은, 모든 움직임을 인식의 대상으로 고정시켜서 지식(이때의 지식은 세계에 대해 수학적으로 구성된 상이다)을 산출하고자 하는 서양의 수학적 세계관의 형이상학적 인식욕(특히 데카르트에 의해 노골적으로 정당화되는)을 구현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근대의 표상적 사유가 대상을 눈앞에 현전하는 것으로 일으켜 세워 지배하려는 의지와 맞물려 있다고 보았다. 박영선 사진이 부정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동안 박영선은 사진을 찍든, 안 찍든 (박영선에게 그 둘은 같은 것이다) 끊임없이 서구의 시각중심주의와 근대라는 신학에 균열을 내는 작업을 해왔다. 《네가네러티브 NEGA-NARRATIVE》가 이전의 작업과 구별되는 것은 정확히, 정확한 근대적 태도로 근대 인식론을 내파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전시는 갤러리 합정지구의 지상과 지하, 두 장소에서 이루어진다. 지하에서는 예의 아무렇지도 않은, 결코 현전하는 것으로 일으켜 세워지지 않는 이미지들이 슬라이드로 보여지고, 지상에서는 정확한 대상들, 기계의 눈으로 본 흔한 쓰레기들이 우리가 한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모습으로 세워져 있다. 사진에 있는 페트병과 비닐봉지는 박영선의 작업이니 분명, 사진 바깥의 많은 쓰레기들을 찍은 것일 텐데, 지하의 작업과 달리 그것은 존재 그 자체로 강렬하게 우리를 찍어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지하 전시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이미지들이 슬라이드로 각기 다른 시간을 가지며 3차원 공간에 한 차원을 더한 공간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서로 이질적인 듯 보이는 지상전과 지하전은 개념적으로는 허구이지만 공간적으로는 진리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한 곳에 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근대라는 신학의 삼위일체는 그 정합성을 시간의 순서대로 줄 세우면서 증명한다. 그러나 《네가네러티브 NEGA-NARRATIVE》에 시간은 없다. 거기에는 근대와 근대의 부정이, 지금이라는 과거와 이제라는 미래가 공존하며 각각 다른 공간이면서 통한다. 공간적으로 통하고 느낌을 갖고 통한다. 사진 바깥의 사진으로 나오듯 지상에서 지하로 들어가는 계단은 김종삼의 싯구처럼 “죽지 않는 계단”6)같다.

  서구의 인식론은 나누어서 분석하고 종합함으로써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세계에 대한 이해를 더했지만, 모순과 모호한 것들을 제외시킴으로써 인간 이해와 세계에 대한 경험을 닫아버렸다. 박영선의 사진은 이 빗장을 풀길 원한다. 초기의 박영선 사진은 근대의 바깥에서, 사진의 바깥에서 그것을 찾으려 했지만, 오늘 박영선의 사진은 어쩔 수 없이 근대에서 혹은 기꺼이 근대의 내부에서, 사진을 행위하며 찾아가고 있다. 박영선은 근대의 틈을 찾아냈다고 확언할 수 있다. 기독교 신학에서 야곱의 사다리는 천국의 계단이며 구원의 상징이지만 유대교에서는 디아스포라를 의미한다. 그 여정의 일부를 이끌었던 모세는 끝내 가나안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죽지 않는 계단은 어쩌면 영원한 계단인지도 모른다.


1) 박영선의  제2회 사진전 《인왕산과인왕산과》(1999, 담갤러리).

2) 박영선,  「다리 위에서」 . 제1회 사진전 도록 《또 다른 시간》(1996, 관훈갤러리).

3) "우리에게 물질은 '이미지'들의 총체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지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은 관념론자가 표상이라고 부른 것 이상의 존재, 그리고 실재론자가 사물이라고 부른 것보다는 덜한 존재, 즉 사물과 표상 사이의 중간 길에 위치한 존재다 " ―앙리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4) “그때 사진은 내게 이상한 ‘매개체’, 새로운 형태의 환각이 된다. 그것은 개념상으로는 허위이고 시간적으로는 진실이다”(『사르트르의 상상계』 사르트르/윤정임 옮김). 푼크툼, 사진의 광기를 한꺼번에 쌈 싸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에 박영선의 사진이 있다.

5) 박영선, 「사진의 형이상학적 기초에 관한 연구―수학적 세계관과 사진의 상관성을 중심으로」, 1999.

6) 김종삼의 시 「엄마」 중에서. “엄만 죽지 않는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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