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은아 개인전
시소 타는 풍경
2022. 02. 18 -
03. 19
마치 바람이라도 부는 것 같다. 1층 전체를 감싸고 있는 초록의 나무와 그 투명함 때문이다. <풍경의 반쪽4.>(2021)에 있는 모든 것은 투명해서 사람, 나무, 그림자는 서로가 서로에게 포개어진다. 하지만 단지 투명하다고 해서 바람이 부는 것은 아니다. 바람이 드나들기 위해서는 길이 필요하다. 이 그림은 등산하는 남한 사람들과 배구하는 북한 사람들을 한 데 그린 것이다. 두 풍경을 하나로 포개면서 서로의 풍경을 방해하는 선이 생기는데, 작가는 이것을 지우거나 뭉개지 않는다. 그 대신 대비를 주어 그것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기로 한다. 이때부터 풍경은 조각나고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작가는 두 풍경이 만들어놓은 이 작은 틈을 벌려 바람길을 튼다. <푸른 기와의 집>(2015)에서는 이 투명함이 완전히 사라진다. 2014년 민주노총이 조직한 ‘총파업’과 청와대를 합쳐 그린 이 작품에 작가는 조금의 여백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림 가득 청와대가 펼쳐져 있고 온통 새카만 군중 사이에는 틈이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정확히 한 지점을 향해 달려가며 청와대를 압박하고, 두 풍경은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버린다.
두 그림의 공기는 확연히 다르다. 두 풍경 사이의 간격에 따라 변하는 것인데, 이 거리는 작품마다 조금씩 달라 전시장을 리드미컬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남과 북의 산을 그린 <산아 산아 푸른 산아>(2018)는 <푸른 기와의 집>처럼 풍경이 포개어진 흔적이 지워졌지만, 그 사이에 여전히 미풍이 분다. 스페인 그라나다와 서울의 풍경을 섞은 <어디 가세요?>(2012)는 반대로 건물 외벽으로 그림자 같은 것이 어른거리고 시점이 제각각이어서 온통 어지럽지만 두 거리는 온전히 하나의 풍경이 된다. 이 간극의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작가가 그림마다 서로 다른 거리감을 가지기 때문이다.
홍은아는 독일로 이주해 생활하고 있는데, 먼 타지에 나가니 한국에서 벌어지는 여러 일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남과 북의 일도 그중 하나였다. 멀리서 본 북한을 향한 일부 보수주의자들의 혐오는 기이할만큼 지나쳤다. 그가 선택한 북한의 풍경이 평범하고, 남과 북 사이에 선선한 바람이 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2014년 총파업 때에도 작가는 독일에 있었다. 당시 정부는 “행진을 막을 수 없다”는 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고 차단벽으로 집회를 저지했다. 경찰은 주최 측을 구속했고 집회 참여자들에게 최루액을 뿌렸다. 공공부문 민영화와 노동탄압에 대해 반대하는 정당한 집회였음에도 폭력적인 대응이었다. <푸른 기와의 집>에서 두 풍경 간의 거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다른 작품과 달리 극적으로 연출된 것은 청와대까지 그 뜻이 가닿기를 바라는 열망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작가가 느끼는 이 거리감을 온전하게 전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회화의 감각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홍은아는 적합한 조형 언어를 찾기 위해서 그림을 반복해서 그린다. 그리는 순서, 물감의 농도, 대비의 정도를 실험해보고 그리지 않은 부분을 더 그려보거나, 그 반대로 지워내기도 한다. <학생들1>과 그 뒤에 걸린 <학생들2>와 같이 그림의 크기를 달리 하거나, <드로잉, 푸른 기와의 집>(2015), <드로잉, 2014년 2월 서울시청 앞>(2014)처럼 펜 드로잉으로 같은 풍경을 여러 차례 그리기도 한다. 그림과 풍경, 그에 맞는 적합한 언어에 대한 고민은 <열린 기법들>(2018-2019)로 이어진다.
이 연작에서 작가는 일정한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에 따라 22개의 풍경을 그린다. 여기에는 사고 현장, 소규모 집회, 전통 놀이, 거리나 도로, 집 안과 같은 풍경이 뒤섞여 있는데, 어떤 것은 익숙하고 어떤 것은 아니다. 그림 간의 고리가 희미하지만 작가는 도리어 불친절해지기로 한다. (<풍경의 반쪽 4.>에서 빨간 글씨가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던 것, <어디 가세요?>에서 한글로 쓰여진 간판이 있던 것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이곳이 어디인지, 이 사람들은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 중인지 알 수 없는데, 그럼에도 관객 중에는 자신의 경험을 빌어 한 곳에 무게를 더 실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작가는 그림을 모두 같은 크기에 그리고 나란히 걸며 그마저도 방해한다. 그에 따라 그림이 담는 상황이나 이념, 가치는 모두 동일한 크기와 부피, 무게로 책정된다.
여기에는 홍은아가 긴 시간동안 그려온 그림이 순서에 상관없이 놓여있다. 그가 선택한 이미지는 시간에 따라 변하지만, 그것이 작가를 쿡 찔렀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다. 홍은아는 그 찔려진 곳을 본다. 자세히 보다가, 그것을 그림으로 온전하게 옮겨 내기 위해 적절한 자리를 찾아 나선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그의 위치만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보는 과정이 보인다. 그는 지금도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이 과정을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그러므로 그림과 그림 사이를 옮겨 다니며 알맞은 자리를 찾아보기를 바란다. 작가가 풍경과 풍경 사이를 가늠했듯, 손 끝의 감각으로 그의 자리를 살피었듯, 시소를 타듯. 전그륜(합정지구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