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세린 개인전
더미
2023.3.17 - 4.16
소란함이 발밑으로 가라앉는 시간, 통유리 너머 유일하게 소등되지 않는 15제곱미터, 아무도 없어야 비로소 보이는 가구. 환대와 은폐를 동시에 수행하기 위해 장소로 존재하는 것, 거리를 두기 위해 만들어진 것. 어쨌거나 긴급한 것들을 우선하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디테일이 숨겨진, 틈새이자 가구, 장소인 가구. “높이는 조금(6cm) 낮추고, 맨 위 판 두께를 늘리고(1.2cm), 바닥에서 살짝(2~3cm). 무언가를 많이 놓지 않고, 휑하게 두는 편이 좋겠다. 한쪽 옆판에 얇은 철판. 구멍에 걸려 튀어나와 있는 스프링.색상은 완전 화이트는 아닌 옅은 미회색. 종이를 붙여서 구멍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¹ 작가가 다듬는 인포데스크는 그렇지만 이런 것. 골몰하고 매만지면 툭 비어져 나오는 디테일, 물성, ‘생경한’ 덩어리.
“고속으로 회전하며 자르는 원형톱들은 보통 기계에서 그 일부만 보인다. 기계를 사용할 때는 위험하기 때문에 그 튀어나온 톱날에온 신경을 집중한다. 마치 시간이 살짝 늘어난 것 같은 순간이다. 하지만 톱날의 형태는 보이지 않는다.”² 작가는 중소기업들이 주로 입점해있는 건물 내 사무실 하나를 작업실로 빌려 쓰고 있다. 창문 너머 지게차의 후진을 알리는 즐거운 나의 집 멜로디와 벽을 타고 울리는 잰걸음 사이에서 홀로 둔탁한 감각을 풍기며, 아래층 제조회사의 기계가 오늘도 분주히 가동되고 있음을 책상의 옅은 진동으로 알아채는 곳이다. 구조 소음과 공기 소음은 소음 저감의 목적을 위해 소음을 매질로 구별해낸 건축용어이다. 각각 벽이나 천장 등의 구조체에서 울리는 소음과 공기 중에 맴도는 소음이라는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이를 명시적으로 그리고 있는 드로잉들은 용어를 설명하는 자료의 도식을 참고했다. 애초에 소리가 아닌 소음으로, 그것을 낮추는 용도로 고안된 것처럼 많은 경우 타인의 소리는 불쾌하기 짝이 없다. 악취는 숨을 참아보고, 꼴 보기 싫은 건 눈을 감아 잠시 모면할 수 있지만, 귀를 막는 데 손은 부실하기 짝이 없어 일단 소음으로 분류된 것에는 속절없이 당하게 된다. (톱날이 돌아가는 하루의 몇 분은 작가가 건물 내 최고 악당이 되겠다) 그런데 가만히 드로잉을 보고 있자니 목적 달성을 돕기는커녕 사방에서 저항 없이 파고드는 화살표에 의욕마저 사라질지경이다. 되레 드로잉이 참, 예쁘다고 생각한다. 경(박)쾌한 후진음과 다급한 걸음이 둔탁함에 속절없이 스미는 공간 안에서 마음의 문제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궁구하는 데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부메랑은 한 손에 폭 들어오는 날렵한 곡선, 앞쪽이 좁고 뒤쪽이 넓은 형태를 가지고 있어 회전력과 공기 저항이 조화를 이루면날아가던 방향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 그렇지만 인과응보의 톡톡한 대가의 상징으로, 우스운 밈으로 전락해버린 애절한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더 익숙한 투척용 원시 사냥도구. 요령을 익힐 신체적 능력과 시간, 비어있는 땅을 찾을 수 없는 도시의 어린이들에겐 헛된 시도로만 남을 장난감. 그러니까 이론적, 상징적으로는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제대로 경험한 적은 없는 기이한 물건이 되어 버렸다. 어차피 이렇게 감각으로 존재할 것이라면 멋진 불꽃무늬가 그려진, 두 팔로 감싸 안을 만큼 커다랗고투박하게 썰린 나무토막에 농담처럼 붙어도 괜찮을 이름. 작가는 출고를 기다리는 상자들이 가득 적재된 건물 내 자투리 공간을 종종 살핀다. 상자 옆면에 매직으로 휘갈겨 적혀있는 단어들, 예컨대 ‘오렌지 모던’, ‘빈티지 여인’ 등이 산책자의 눈에는 암호처럼 기묘해서 내용물을 유추하는 것이 퍽 즐거웠을 것이다. 대부분 시즌별로 신속히 종류가 교체되는 싸구려 잡화들일 테고, 그중 ‘플리토 아기 천사 16개’는 연말의 달뜬 분위기에 충동적으로 팔려나가 묵은해와 함께 용도폐기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여기, 그 자투리 공간에서 시작된 문세린의 천사들이 오래 쓰인 비누처럼 반질거리고 뭉툭한 모습을 한 채 오밀조밀 모여있다. 깃털과 주름이 물렁하게 솟아나는 중일까 더듬더듬 사그라드는 중일까. 작가는 어쩐지 서러운 처지에 놓인 사물들을 가져와 선명한 상징을 쓰다듬어 닳아 없애도 어디까지 여전히 그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까 경계를 탐색하는 것 같다. 정상의 범주에서 기능하는 것들이 가진 제약 내지는 서러움을 깎아내고 주물러 “오해와 오작동”을 발생시킨다. 가만 보니 무리에 유령이 섞여들었다! 엔젤과 고스트는 동거가 어려운 다른 장르 세계의 캐릭터들인데 이렇게 모여있으니 사촌쯤 된다고 우겨봐도 괜찮을 것 같다.
“오해와 오작동”은 작가가 작업과 일상을 마주하며 세워둔 그만의 태도 같은 것이다. 등을 두드리며 재촉하는 손길에 괜스레 걸음을 무겁게 떼고, 지나치게 공감되는 이야기에는 그 조속함을 반문해 보는 것. 무엇을 그르치고자(誤) 하는 것이 아니라 거침없는 사고, 시선, 움직임에 돌부리 하나를 놓아 생긴 미세한 균열과 갈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느 날 오래전 그려놓은 그림을 다시 펼쳤는데 당시 머리를 그렸던 것인지 주먹을 그렸던 것인지 헷갈렸다고 한다. 머리는 지적인 기관으로 주먹은 힘의 상징으로 상반된 개념으로 쓰이는데 말이다. 그렇지만 크기를 나타낼 때는 함께 놓이기도 하는데 ‘주먹만 한 머리’는 단순히 형태의 유사성에서 유래한 건가? 신체에서 둥근 것이 이 두 가지뿐일까. 그보다 왜 ‘머리만 한 주먹’이라는 표현은 쓰이지 않을까? 주먹의크기가 크고 작은 건 미적으로 고려할 가치가 없어서인가. 그렇지만 힘의 논리에서는 가치가 있지 않나? 사소한 혼란스러움이물음으로 연쇄되고 사유가 얽혀 버렸다. 작가는 나무토막을 정성스럽게 깎아내며 머리를 떠올렸을까 주먹을 떠올렸을까. 작가의 일상을 이처럼 오해와 오작동의 순간으로 기꺼이 탈바꿈시키는 것은 사물, 감각, 문자(이름)처럼 다종다양하다. 합정지구 지하층 암실에서 속을 훤히 내보이고 있는 머그컵과 운동화는 시간에서 시작되었다. 담배와 차는 게으르다거나 한심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도 제자리에서 사색할(멍 때릴)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 준다. (커피는 조금 다르게 작동하는 것 같다) 하르트무트 로자의책 『소외와 가속』에서 “서구 근대성의 영역 밖의 그 어디에서도 ‘해야 한다’라는 수사로 일상의 행동을 그토록 초지일관정당화하는 일은 없다.(…해야 한다는) 목록은 끝이 없고, 종국에는 ‘느긋해지고 진정하려면, 좀 쉬려면 정말 무언가 해야 해’까지이르게 된다.”³고 적힌 걸 읽었을 때 가슴 언저리가 뻐근했다. 알면서도 좀체 떨칠 수 없는 악몽 같은 주문이기에. 으레 그렇듯그날의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리며 차를 마시는데 시선 끝에 닿은 머그컵과 운동화의 안쪽 모양이 궁금해졌다고 한다. 그렇게 반년을 그들을 만지작거리며 잡기(雜記)들을 쌓았는데, 예컨대 “머그컵이 그 자체로 the mug와 a mug를 구분하기 어려운 이상한 점이 있고, 어디선가 준 머그컵을 오랫동안 매일 사용하면서도 항상 소품 같은 면이 있음을. 머그컵은 몰드이자 원형인 기하학적인 것.
원래 내부에 빈 공간을 가진 물건이라서 상황이 복잡해진다. 신기할 정도로 형태가 크게 변하지 않았다.(3700년전 미노아 머그컵, 원삼국시대 머그컵)”⁴같은 것들이다. 작고 나직한 배치가 신경 쓰이는 상판과 바닥에 엉뚱하니, 빈 공간을 떠내어 배를 갈라버리는 바람에 뚱뚱해져 버린 머그컵과 운동화가 만들어졌다.
문세린은 작업실 안팎을 구성하고 있는 익숙하고 평범한 요소들이 짐짓 기이하게 다가왔던 찰나를 새로운 형태로 다듬고 재결합해 생경한 풍경으로 만들어낸다. 누군가에게는 오해와 오작동의 순환이 우회하거나 언뜻 같은 자리에서 맴도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목적이나 당위 혹은 가치가 있는 일이었는지 묻는다면 그저 그 모든 시간이 ‘이상하고 재미있었다’고 대답할 수밖에. 쉴 때조차 무엇을 해야만 한다는 조바심에 시달리다 보면 지나쳐온 장소, 손에 쥐었던 사물, 시선 끝에 걸렸던 뭇생각들의 많은 부분이 희미해져 경험은 한 줌으로 쪼그라든다. 즐겁고 기이했다는 소회만큼 기억을 생생하고 윤이 나게 하는 것도 없을 텐데, 그렇다고 한다면 돌부리에 조금은 덜 인색해져도 좋지 않을까.
신지이(독립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