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의 잔존, 야행성에서 백야행성으로
‘백야’와 ‘야행성’을 합한 제목의 전시 <백야행성>은 백야 현상에 내몰린 야행성 동물의 삶을 상상한다. 어둠이 내리지 않는 긴긴밤 동안 야행은 쓸모없는 습성이 되고, 야행성 동물은 불가피하게 이전과는 다른 삶을 모색하거나 새로운 서식지를 찾아 떠나야만 할 것이다. 백야는 그들이 미처 저항할 틈도 없이 생존 능력과 터전에서 축적해 온 시간, 그리고 마침내는 그들의 삶 자체를 수탈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들의 삶이 서서히 혹은 급격히 붕괴되는 중에도 백야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찬란하게 밝기만 하다.
미술사학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저서 《반딧불의 잔존》에서 쉽게 발견할 수 없기에 소멸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 어딘가에 잔존하고 있는 ‘반딧불’을 ‘민중’에 비유한다. 산업화와 소비주의가 독재하는 오늘날, 부패한 권력자들은 정치적 실력을 행사하기 위해 강력한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했다. 권력을 미화하는 후광과 경쟁을 유도하는 착취의 불빛은 우리 사회를 더욱더 환하게 비추고, 이들에게 저항하는 민중은 감시를 피해 반딧불이처럼 깊은 어둠 속을 떠돌아다닌다. 권력의 변두리에서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은은한 미광을 밝히는 반딧불은, 민중인 동시에 ‘이미지’를 상징하기도 한다. 어떤 번쩍임과 함께 단속적으로 재출현, 재소멸하는 반딧불의 존재가 벤야민의 변증법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앞의 이미지를 백지 상태에서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까지 보아왔던 이미지들의 시선에서 바라본다. 이때 관찰자의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던 과거는 현재와 만나 끊임없이 변모하면서 사유를 발생시키는데, 과거의 변모는 반드시 새로운 미래상을 동반하기에 이미지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변증법적 이미지는 강한 ‘재현’이 아니라 미미한 ‘잔존’의 방식으로 작동하면서 힘을 갖는다.
이처럼 전시는, 우리가 식별할 수 없도록 눈멀게 하는 서치라이트와 같은 백야에서 눈을 돌리고 주변으로 밀려난 존재들과 만나고자 한다. 막막하고 시린 현실이지만, 야행성 동물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어딘가에 무리를 형성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상상할 것이다. 상상하는 방식에는 근본적으로 정치하는 방식을 위한 조건이 놓여있다. 반딧불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우선 어둠을 긍정해야 하듯이, 전시 역시 밝은 미래를 기약해주지 않는 백야라는 환경을 직시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강한 빛’의 이면에서 반딧불은 비록 희미하고 취약할지라도 공동체를 꿈꾸는 ‘약한 빛’으로 잔존한다. “반딧불이 순수하고 단순하게 소멸한다는 것은 오로지 우리의 시야에 대해서일 뿐이다.
(…) 반딧불이 관찰자의 시야에서 소멸하는 이유는 관찰자가 머물러 있는 장소가 더 이상 반딧불을 발견하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1) 마찬가지로 백야 아래에서 야행성 동물의 삶이 전멸할 것이라고 섣불리 단언하기는 어렵다. 야행성 동물의 소멸을 방관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그들의 뒤를 쫓기를 포기하지 않는 우리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백야행성>은 야행성 동물의 멸종이 아니라 백야행성 동물의 탄생에 관한 이미지다.
-이현
1)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반딧불의 잔존》, 김홍기 옮김, 도서출판 길, 2016, 47~48쪽.
공간 : 괄호
엽서 : 이상엽
도록 : 톱니귀
촬영 : 홍철기
도움 : 김홍기 황신혜
후원 : 서울문화재단
백야행성 Nocturnal Animals in the White Night
기획 : 이현
참여작가 : 양유연, 이제, 박광수, 최한결
2016.12.2 -
201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