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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는 집 밖을 나서 오며 가며 마주한 일상적 풍경을 그린다. 사는 동네의 좁은 골목과 자주 다니는 산책길, 지방으로 이어진 고속도로, 청계천이나 경복궁 같은 도심 속 휴양지, 대로와 아파트 단지와 맞닿아 있는 한강변... 도시에 사는 이들이라면 살면서 수없이 지나칠 풍경들이다. 작가는 이 익숙한 풍경에 깃들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치듯 감지했다가 금세 잊고 살 법한 생경한 인상을 포착해 그려 낸다. 그런 인상은 약간 어설프게 조합된 풍경이나 쓸데없이 생생한 빛을 발­하는 물체를 봤을 때 감지되는 것이다. 예컨데 한겨울 길 한켠에 치워 놓은 흰 눈더미와 대비되는 젖은 아스팔트의 불편하리만치 선명한 남색, 문화재 옆에 세운 맨질거리는 가림막의 이질감과 시멘트 바닥에 검푸르게 드리운 그림자, 주택가 자투리 공간 바닥에 바른 싸구려 진녹색 에폭시의 닳아버린 모양새, 쓰레기 봉투에 머리를 박고 있는 도둑고양이의 뒷태 같은 것들 말이다. 아니면 황폐하기 이를 데 없는 공사장에 쌓여 있는 흙더미의 유혹적이고 부드러운 질감, 도시를 가로지르는 한강물의 더러움과 범람할 것 같이 움직이는 물의 힘을 마주할 때의 공연한 불안함 등을 떠올려 봐도 좋겠다.

 

 임진세가 옮겨 담은 풍경은 도시와 사람, 인공과 자연이 한데 뒤섞여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세상의 모습이다. 물론 그 기묘한 조화는 일상적이며 익숙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을 구성하는 오만가지 것들이 이루는 불편한 균형만큼이나 부조리하고 위태하다. 그는 생활에 닳고 찌들어, 필요에 의해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동화되어 가는 사물, 사람, 자연을 그린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인 바깥 풍경을 있는 그대로 ‘공평하게’ 바라보았을 때, 의외의 지점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약간의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그림에 담고자 한다.

 

 이번 전시작들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물’의 이미지는 습기찬 강변에 무겁게 내려앉은 대기에서부터, 다양한 모양새로 거리에 쌓여 있는 눈,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창 밖 시야를 흐리는 비, 서울 하늘에 뜬 무지개 같은 날씨로 도시 속 풍경에 녹아들어 있다. <도봉동 무지개>에서는 산 근처 변두리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소머리국밥집의 현수막과 늘어진 전신주  위로, 팽팽하게 잡아당긴 것 같은 질감의 어둑한 하늘을 희미한 색의 무지개가 가로지르고 있다. 싸한 느낌이 감도는 하늘에 뜬 다소 창백한 색의 무지개지만, 작가는 그의 지난 말처럼 “척박한 도시 안에서 살아남은 자연이 생명력을 자랑하는 순간의 반짝임”에 박수를 보냈을 지도 모르겠다. 그의 풍경에는 대부분 자연이 주된 요소로 등장해 왔지만, 그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자연’만을 따로 화폭에 옮기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그의 관심은 자연 속에 내던져진 인공물이나(1회 개인전, 2009), 도시 속에 스며든 자연의 이미지(2회 개인전, 2011), 혹은 이것들이 함께 모여 형성하는 긴장감을 향해 있다. 위의 습기찬 풍경들에서는 과거작들에서 보인 재빠른 필치와는 다른 다양한 붓질과 묘사를 실험함으로써 도시와 자연이 함께 빚어내는 쓸쓸한 정서를 한층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다.

 

 전시에서 가장 강렬한 힘을 내뿜고 있는 물의 이미지는 밤의 청계천이다. 청계천의 노랗고 붉은 형형한 인공 불빛을 받으며 넘실대는 시커먼 물과, 이를 구경하고 있는 천변의 커플들의 모습은 흔히 말하는 낭만적 여가와는 거리가 멀다. 한껏 인공적인 자연을 찾아와 말그대로 ‘한쌍의 바퀴벌레’ 같이 붙어 있는 남녀의 형상은 어두운 몇 번의 필치로 그려져 시멘트 계단에 그림자처럼 스며들었다. 하수구에 모인 쥐떼처럼 켜켜히 겹쳐 있는, 괴기스럽지만 어디서 본 적 있는듯 묘하게 위화감 없이 풍경과 하나된 이 인물들에 대해 작가는 말했다. “사람이 시멘트 벽 속에 스며들어 도시화된 것 같은 느낌이에요. 인간을 숙주로 삼은 에일리언 같은거죠. 사람이 도시를 계획해서 만들지만,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의도를 하건 안하건 사람도, 생물도 아닌 다른 어떤 존재가 되어서 도시에 기생하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요”  같은 맥락에서, 대기 중인 택시기사를 그린 또 다른 작품에서는 아예 투명하게 표현된 인물이 배경의 대리석 벽과 카멜레온처럼 동화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사실 임진세의 그림은 우리의 도시를 둘러싼 어떤 부조리를 언급하려는 의도를 지녔다기에는 그림 속 모든 요소가 너무도 과장없이 담담한 시선으로 그려져 있다. 한편, 작가가 특유의 관조적인 시각을 통해서 빚어낸 풍경은 마치 지구에 방문한 에일리언이 처음부터 새로 바라보기라도 한듯 자비없이 직설적이고 대담하다. 임진세의 표현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담고자한다는 의미에서 ‘사실적인’ 회화의 길로 향해 있는 듯하다.

_김수영 (미술비평)

 

 

디자인 : 강동형

임진세 개인전

막다른 곳

2015.3.27 -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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