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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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벽에 놓인 얼굴들을 마주한다. 국화꽃 자매들이란 이름이 붙은 노인여성 넷. 회색 배경지와 카메라 앞에서 취한 과장된 몸짓들과표정들, 단장한 머리와 화장, 취향을 드러내는 옷의 무늬와 장식들을 마주한다. 내가 알던 늙은 여자들의 얼굴과는 닮은 곳이 없어 낯설다. 아니, 떠올릴 수 있는 노인여성의 얼굴들이 몇 없기 때문인지 모른다.
동시에 노년의 삶을 상상해본 일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노인여성 예능인의 삶은 더더욱 떠올리기 쉽지 않다. ‘노인’, ‘여성’, ‘예능인’은서로 맞물리지 않는 단어들처럼 덜거덕거린다. 애써 한 문장에 모은다고 해도, 각각의 단어 사이에는 지난한 시간이 놓여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사진에는 국화꽃 자매들 넷의 얼굴이 선명하게 찍혀있다. 사진들은 상상하기 쉽지 않은 어떤 삶의 증거물일까, 그들이 연기하던 어떤 인물의 재현일까. 마주한 얼굴들은 말없이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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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하나. 자동차 뒷좌석에 어깨를 맞대고 앉은 국화꽃 자매들의 얼굴이 비친다. 자동차는 어디론가 향하고 있고, 가다 멈추기를 반복한다. 그들은 조금 지쳐보이는 몸과 짐을 자동차의 속도에 기댄다. 그중 하나가 목소리를 내어 말한다. 더위와 피로에 대해, 그들이 맞이한 여름에 대해. 또 하나가 이어 말한다. 기대와 기쁨에 대해, 그들이 맞이한 여름에 대해. 피로와 흥분이 뒤섞인 얼굴들은 차창으로, 자동차 앞유리로 지나가고 다가오는 것들을 바라본다.
그러나 영상 <#시퀀스_국화꽃 자매들>에는 최종 도착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탄 자동차는 어떤 곳에서 다른 어떤 곳으로 이동하거나, 연습실에서 촬영장으로, 카메라 앞에서 카메라 앞으로 옮겨가거나, 각자 손에 든 스마트폰의 지도를 가늠하며 골목길을 헤맨다. 넷은 서로 앞장서거나 뒤따르거나 의견을 내고 모의하고 반대와 찬성을 하면서 움직인다. 그들 모두에게 무언가 중요한 곳/것을 찾는듯, 천천히 함께 나아간다. 넷은 서로의 동행인이 되어 수많은 경유지들을 구불구불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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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는 이들로부터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목적지는 이동 자체인 것처럼, 카메라는 넷의 경로를 뒤따른다. 스크린에 재생되는 타임라인은 이들의 보폭에 속도를 맞춘다. 1초에 24컷 혹은 30컷의 스틸-이미지가 기록되고, 기록된 이미지들이 스크린 위에서 무빙-이미지로 재생되면서, 넷의 시간은 느릿하게 굴러간다. 국화꽃 자매들이 자동차 뒷좌석과 골목길과 육교 위에서 풍경을 마주하듯, 스크린을 마주한 이들은 앞에 놓인 장면과 시간을 맞이한다. 그러나 영상의 경로는 완결된 시공간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의 경로가 그랬던 것처럼 직선으로 오지 않는다. 어떤 시간 축 또는 공간 축을 맴돌면서 다가오는 것들을 맞이할 뿐이다.
영상 <#시퀀스_육교>, <#시퀀스_내 나이가 어때서>에는 제목이 지시하는 완결된 시퀀스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시퀀스, 어떤 장면을 위해 연습을 반복하는 국화꽃 자매들의 모습을 비춘다. 여자들이 웃는다. 여자들이 춤을 춘다. 박자에 맞춰 발을 움직이거나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돈다. 여자들이 말한다. 한 글자 한 글자 반복해서 말한다. 여자들이 입 밖으로 울리는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다시, 여자들이 웃고 춤을 추고 말한다.
시퀀스는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여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완성된 웹드라마의 1분도 채 되지 않는 시퀀스는 맞물리고 맞물려 13분 1초로, 24분 5초로 늘어난다. 그리고 늘어난 시간은 약 18,744컷과 약 34,560컷의 프레임들로 이어진다. 스크린에는 완결된 시퀀스 대신시퀀스를 맴도는 시간과 장면들이 겹겹이 놓인다. 프레임들은 이들이 지나야 할 경유지들이 된다. 그럼에도 자매들은 분투하며 장면과 장면 사이를 거쳐 나간다. 부딪히고 반복하고 통과하고 실패하면서 조금씩. 다가오는 것들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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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흰 벽에 빽빽한 얼굴들을 마주한다. 웃고 있는 얼굴들에서 시퀀스를 맴도는 잔상들을 발견한다. 사진의 시간은 아직 고정되지 않았고, 이어지는 시퀀스를 향해 더디게 움직이고 있다. 그 시간 축 위에서 얼굴들은 되고자 했던 것, 포기했던 것, 되고 싶은 것, 그럼에도 다다른 것이 된다. 그리고 얼굴들은 다가오는 것들과 눈을 마주친다. 노인-여성-예능인이, 그들을 끈질기게 바라보는 노년-여성-예술가가 앞에 놓인 시간을 향해 눈길을 준다. 미래는 등 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기에, 먼 곳으로부터 자신의 경로를 그리면서 도달하기에, 네 얼굴과 카메라는 마주한 세계로부터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다만 다가오는 것들을, 미래를 자신들의 속도로 조금씩 길들인다.
_이민지
사진: 이훈
음악: 최태현
설치: 김연세
포스터 디자인: 박재영
주최: 합정지구
후원: 서울시, 서울문화재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극단 듀공아, (사)한국시니어연합
도움주신 분: 김진우, 박한솔, 신상은, 이영, 권오순
이형주 개인전
국화꽃 자매들
202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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