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름 개인전
HAPPY TIME IS GOOD
기획 : 이진실
2021.4.9 -
5.9
정여름의 첫 개인전 《HAPPY TIME IS GOOD》은 장소의 은폐와 위장, 그리고 그 자리에 깃든 기억을 다룬다. 주한미군기지라는 지정학적 공간을 범람했던 공적, 사적 경험과 이데올로기를 탐색하는 이번 전시 는 2020년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Graeae: A Stationed Idea》 (2019)과 신작 <긴 복도The Long Hole》 (2021)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한반도의 미군기지는 분단이라는 현실을 환기시키는 누빔점이자, 점령 혹은 전쟁을 아직 끝내지 못한 망령들의 수용소다. 무엇보다 땅의 원주민들에게 그곳은 금기시되고 비밀에 부쳐지는 올림포스 산이다. 미군기지는 반환과 이전이라는 행위가 벌어지지만 어디에도 표시되지 않는 비가시적인 영토다. 평화라는 미심쩍은 대가를 구실로 현재와 미래를 저당 잡혔던 이 땅들은 태평양 너머 모체의 말초신경으로 복무 하다 이제 지정학적 질서와 전략 변화에 따라 '퇴역한다. 곧 이곳들은 구글어스에 표시된 녹지의 가면을 벗겠지만 여전히 어긋난 시간, 기억, 단절로 뒤덮여 있다. 식민의 증표로서 '빼앗긴 땅의 메타포를 백퍼센트 채워온 미군기지는 작가의 작업에서 가시성과 비가시성, 위장과 출몰 이 뒤얽히고 때로는 좌충우돌하는 복잡다단한 영토가 된다.
식민주의 모순이 응축된 이 단단한 공간에 접근하는 용산구 주민 정여름의 태도는 편집증적이라 할 만큼 집요하면서도 꽤나 뻔뻔하고 맹랑하다. 《그라이아이 : 주둔하는 신》은 접근 불가능한 용산미군기지 를 ‘포켓몬 고’라는 증강현실게임을 통해 진입하기를 시도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그 장소적 기호들에서 작동하고 있는 논리들을 파헤친다. 철조망과 벽으로 가로막혀 있는 용산미군기지의 내부는 위성사진 으로도 초록 픽셀의 카모플라주로 가로막혀 들여다 볼 수 없다. 하지만, 증강현실 게임과 소셜미디어라는 동시대 네트워크 환경은 은폐된 장소로 통하는 또 다른 우회로를 열어놓는다.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은 이 위장된 장소에서 누수되는 욕망과 기호들을 퍼즐 놀이처럼 짜맞춰본다. 일제강점기 시절 사료들부터 도래할 용산공원의 3D 청사진까지 시간의 양측을 횡단하면서 현실 혹은 실체라고 믿는 바닥을 파헤친다. 우리는 부유하는 듯한 스마트폰 액정 속 움직임과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현실의 보폭을 동기화하면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놓인 기호들의 가치, 의미, 이데올로기를 함께 심문하게 된다.
이처럼 작가가 역사라는 종축과 동시대라는 횡축을 교차시키는 주 매개체는 GPS, 위성사진, CCTV 등의 시각 정보 테크놀로지이다. 보는 법과 공간의 인지 방식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는 이것들은 우리가 본다고 믿는 것 속에 존재하는 맹점, 또 그 맹점 뒤에 도사린 또 다른 응시를 환기시킨다. 전례 없는 코로나19라는 상황 속에 최근 유출된(시킨 미군기지 내 CCTV로 만든 작업 <Kill The Virus, Stop The Spread, Protect The Force》처럼, 그러한 시각적 테크노크라시는 비가시적 존재와 식별의 대상을 언제든지 자리바꿈한다.
정여름은 《긴 복도> 작업을 통해 다시 한번 위장막으로서의 미군기지 가 지니는 복잡한 역사적 기억과 경험을 조사하며 식민적 장소라는 문제의 지평을 확장한다. 2020년 작가는 69년 만에 원주시의 품으로 돌아온 캠프 롱기지를 축하하는 행사 'CAMP 2020'에 전시 참여작가 로 방문하게 된다. 그곳은 우연찮게도,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작가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자신들의 '해피 타임'을 일궈온 터전이기도 하다. 여기서 터전이라는 말은 절반 정도만 맞는데, 조부모의 실제 터전은 미군기지의 쓰임을 위해 미군들이 불태워버렸고, 할아버지는 기지의 PX에서 '하우스보이'로 일하며 이 이방 도시에 기생해 가족의 생존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캠프 롱은 이들의 삶을 쓸어버린 해일이면서 동시에 그 삶의 존속을 가능케 한 우물이었다. 《긴 복도》는 그 착종된 시간을 헤집어보는 탐정의 조사보고서다. 탐정은 동료(AI)와 함께 투명한 시공간좌표값 아래 폐허가 된 기억과 망각, 사적/공적인 역사, 그리고 현재라고 부르는 각기 다른 세계를 조사한다. 원주의 캠프 롱 기지에 대해 구글맵에서 유일하게 발견할 수 있는 정보값, '캠프 롱 ATM'은 스크린을 뚫고 나온 얼룩, 군사적인 외양 뒤에 자리한 금융 자본주의 네트워크라는 실재다. 숲, 기지, 황무지라는 긴 변화의 시간 속에 영속적 기표로서 위장막을 뚫고 솟아 올라 있는 그 좌표를, 탐정은 단절과 망각을 발굴할 구멍으로 삼는다. 페도라가 찍은 네거티브 사진들, 구글 어스의 위성사진 정보 기록, 그리고 이시도라의 기억 진술이 조사실로 소환된다. 탐정의 탐사 속에 드러나는 이시도라와 페도라의 시공적 실체는 동어반복적이며 맹목적이며 텅 비어 있기에 이해 불가하고 모순적이다. 무엇보다 단순한 영어 단어와 문장들로 기록된 이시도라의 다이어리는 '행복'이라는 말의 실체를 계속 되묻게 만드는 수수께끼 뭉치다.
이탈로 칼비노의 환상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페도라는 꿈꾸었던 페도라를 빛나는 유리공 속에 보존한 채 잿빛 돌들로 높이 쌓아올린 도시, 이시도라는 꿈 속에서 보았지만 노인이 되어서야 도착하는 도시다. 《긴 복도》에서 이시도라의 유토피아는 낮꿈처럼 잠깐 거리를 활보한다. 이시도라의 기이한 '해피타임', 아나키스트 정의 속절없는 유폐, 질주하는 린지의 채굴 속에서 우리는 어지럽도록 중층적인 유사 현실, 보이지 않는 지점을 향해 각기 다른 속도로 달려가는 욕망들의 메타세계를 맞닥뜨리게 된다.
_이진실
진행 : 전그륜
공간 : 권동현, 권세정
디자인 : 이산도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서울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