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이름
지금, 합정 지구의 모퉁이에 풀어지는 이 전시는 박세진과 부원희, 둘의 관계 안에 쌓여 온 지난 시간에 관한 전시이다. 그리고 이 전시는 “미술의 안에 대해, 밖에 대해, 서로에게 보여주고, 이야기하고, 증명”하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박세진과 부원희는 미술대학에서 선후배 사이로 만났다. 이후 한 사람은 ‘예술가’라는 이름을 부여 받고, 한 사람은 그러지 못했거나/않은 상황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한 사람이 여러 매체를 거쳐 결국 회화에 정착하는 동안, 다른 한 사람은 접시에 그림을 그리거나 서체를 공부하고 시를 썼다. 그렇게 둘은 서로 “다른 예술 활동”에 매진했고, 때로 서로에게 영감과 힘이 되어주던 사이 25년이 흘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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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전이라는 전시의 형태는 그 내부를 구성하는 작품들 사이의 순수한 내적 연관을 사유하도록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전시는 여하한 형식적/내재적 연관에 선행하여,두 주체의 긴밀한 우정 –평등 –모종의 사랑을 딛고 발생한다.
관객은 이 점을 반드시 유의해야 하며, 그제야 비로소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접근할 수 있다. 왜, 박세진이 찢어버린 그림(<그림>2014/2019)과, 부원희가 백묵으로 써 내린 시들(<눈 오는 날- 성균관 중이방에서>)이 만나야 하며. 왜, 부원희가 소금으로 흩어 놓은 자리(<그림그림자>) 끝에 박세진의 회화(<산, 자이언트>)가 걸려야 하는지. 또, 미대를 졸업한 시점부터 현재에 이른 부원희의 기억과 행위들이(<그 바벨의 도서관>), 회화에 터를 잡기까지 박세진의 이야기(<풍경 9>,2002, 2pieces)에 겹쳐지는 까닭은 무엇인지.
아렌트(Hannah Arendt)는 세계를 외재화 시키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사랑을 비정치적이라 했다. 어떤 관계가 시작되고 나면, 흔히 둘 사이에 일어나는 사랑의 사건은 그 둘 밖의 세계를 배타적으로 밀어내곤 했던 것이다. 아렌트는 같은 이유로 사랑을 마냥 옹호하지는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정치적인 것 (정치)에 대한 사유를 놓지 않았다.
문제는, 세계를 배타적으로 만들지 않는 ‘사랑’의 가능성이 제기된다는 점이다. 이때의 사랑은 무엇인가? 실제로 우리가 쓰는 사랑이라는 말은 내포와 외연의 언어적 혼동을 다분히 가지고 있다. 가령, 에로스Eros, 우애philia, 아가페agape, 욕 망cupiditas, 자애caritas, 연민compassio, 형제애fraternitas. ... 2
이와 같은 사랑의 종류를 검토하면서,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 내재한 보편적 유대의 가능성으로서 ‘객관적인’ 사랑과, 현대적 의미에서 감정과 열정에 관한 ‘주관적’ 사랑을 견준다. 이윽고, 보편적 유대 속에서, 배타적이지 않으며, 자연발생적이지도 않고, 의지적이며, 윤리적으로 작동하는 감정을 매개로, 사랑/우정이 정의된다.
아렌트가 옹호하는 사랑은 인간의 조건으로서, 의지와 윤리, 저항을 작동시키면서 곧 정치가 된다. 사랑의 정치. 아렌트가 “세계의 사랑amor mundi”이라 이름 붙인 사랑은 정치를 작동시킨다.
그것은 왜 정치가 되는가? 사랑은 각종 격차들의 틈을 드러내고 또 메우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술가와 예술가가 되지 못했거나/되지 않은 자, 작품의 권위를 부여 받은 것과 아닌 것(<폭포>), 사용할 수 있는 것과 사용할 수 없는 것(<모래의 책>,<원근법>), 발견되는 것과 창조되는 것(<판자의 가르침>), 훼손되는 것과 보존되는 것(<그림>), 순환되는 것과 쌓여 멈추어 있는 것(<로젠광장>)을 드러내고 질문한다. 그리고 그것은 문명, 계급, 각종 지위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차이’에 관여하며, 상실과 애도를 노래하고 애도의 봉합 역시도 횡단한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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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의 사유를 이어가며 혹자는 흥미롭게도 여성 주체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관계가 ‘우정’이 아니라 ‘평등’이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그는, 이때의 평등이 관계를 수식하는 말이 아니고 그 자체로 관계의 존재 양태라고 덧붙였다.4 나는 이 주장에 완전히 수긍하지도 이러한 주장을 해당 지면에 정확히 상술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박세진, 부원희가 전시 《내 눈이 가늘어진다》를 통해 보여주는 것을 이에 연관시켜 볼 수는 있다.
박세진은 자신을 둘러싼 곳곳에서 ‘계급’과 ‘격차’를 발견하고, 부원희는 시와 삶의 안팎을 오가며 소위 미술계의 테두리 밖에서 어떤 ‘차이’를 언급한다. 그리고 전시는 이들의 오랜 우정/사랑이 빚은 관계, 그 평등을 통해 틈을 메운다. 이들의 작업은, 누군가 여전히 둘 사이를 가르는 것이라 여길지도 모를 무엇에 질문을 던진다. 그리하여 지금 합정지구의 2인전은 수식어가 아닌 존재로서의 ‘평등’을 전경화한다.
_허호정(미술비평)
1. 인용은 모두 작가의 말.
2. Shin Chiba, “Hannah Arendt on Love and the Political: Love, Friendship, and Citizenship,” The Re
-view of Politics, Vol. 57, No. 3 (Summer, 1995), pp. 505-535.
3.두 작가는 대화 중에 작업실을 둘러싼 서울의 지역 개발문제에 대해 논하거나,세월호 이
후의 풍경화/회화의 (불)가능성을 언급했다.
4. 이성민, 『사랑과 연합』 (서울: b, 2011), 173-183쪽.
사진 : 홍철기
부원희, 박세진 2인전
내 눈이 가늘어 진다
2019.5.10 -
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