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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그리고 우리*는

공동기획 및 참여작가: 권동현×권세정, 새훈, 여진, 한솔

2023.12.29 -

2024.2.4

참여자 각각은 기존에 구획된 경계와 이미 쓰고 있는 언어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살 순 없지만 그것으로는 말해질 수 없는 관계, 그 안의 삶을 만났을 때 이를 생략하지 않고 위치시키려는 현장 속에 있다. 그 안에서 타자가 ‘차이’라는 이름으로 인식되고 자리 잡게 됐을 때, 타자는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가 될 것이다. 서로간의 차이가 묵살되지 않고 진동으로써 관계맺을 수 있다면 그제서야 ‘각각’이 아닌 ‘우리’라는 말을 어설프게라도 꺼내볼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가 동일체가 아닌 다양체로 인식 될 때, 이미 각각의 신체가 어떤 관계 위에서 형성되었음을 인식하게 됐을 때, 우리*라는 말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이 전시에 서로 간의 연결이 “같은 것의 지옥”1이 아닌, “공명의 공동체”2가 되길 바라는 불가능한 꿈을 담았다. “익숙한 공동체”3에 환수되지 않는 공동체. “불편한 우정”4을 나누는 생성의 공동체.

 

여기서 공동체는 감각에 가까울 것이다. 즉 우리*는 그 생성의 공동체라는 감각을 공유하는 혼종집합이 되기를 희망한다. 동일이나 전체란 말로 각각의 특성이 환원되지 않으면서도 연결되어있다는 감각을 만들어내는, 그리고 그 연결이 기존의 것의 재배치를 만들어낼 그 혼종집합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혼합은 영원한 과정이지만, 상상계처럼 새로운 것이기도”5 하다. 다양한 혼종성의 뒤범벅mélange 상태에서 대항적인 것을 좇는 (혼종)집합을 우리*로서 그저 희망하고 상상하며 생성해볼 따름이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말하기를 멈추지 않되, 우리의 차별과 억압만이 특별하다고 중요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소수자들과 함께, 정상성과 보편을 의심하고 싸우는 이들과 함께 의존과 연대의 의미를 다시 쓰는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 장애여성공감 20주년 선언문, 2018

*.우/리, ‘우/리’, 우/////리, 우‘리’, 우리, ᄋ,ᅮ,ᄅ,ᅵ, ᄋ,ᅮ-ᄅ,ᅵ, 우;리, ...

1.한병철, 『타자의 추방』, 이재영 역, 문학과지성사, 2017, 56쪽

2.한병철, 『리추얼의 종말』, 전대호 역, 김영사, 2021, 21쪽

3.권명아,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 갈무리, 2012, 104쪽

4.진은영(2009)이 니체의 말을 빌어 심보선과 함께 『문학과 사회』 87호에서 문학계에 ‘불편한 공동체’되기를 제안하며 사용하였고, 권명아(2012)는 위의 책 2장에서 이를 적극 인용해 불편한 우정을 익숙한 공동체의 정동과 이항대립 관계로 위치시키며 기존 동지애를 과시하는 결합을 무화시킬 동력으로 삼았다. 본 전시의 참여자인 우리*는 차이를 되물으며 관계를 지속 생성해가는 공동체를 상상하던 중 “불편한 우정”을 재인용했다.

5.얀 네데르베인 피테르서, 『지구화와 문화』, 조관연, 손선애 역, 에코리브르, 2017, 86쪽

피테르서는 이 책에서 혼종성으로 지구화를 바라보는 관점과 한계를 소개하며 그 속에서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그 과정에서 뒤범벅mélange이라는 용어로 어떤 상태를 가리켜 표현했다. 혼종된 채 존재하는, 즉 이미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들 간의 (영원한) 혼합 말이다. 본 전시와 참여자 각각의 작업이 혼합되며 연결된 상태, ‘그리고’ 앞으로 관객과 생성해나갈 관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엮임은 종과 종을 관계 주체로 설정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개별 관계를 지워내는가.     권동현×권세정은 그중에서도 ‘개’, 자신의 곁을 지켰던 그리고 지키고 있는 ‘개들’에 주목하여, 명료한 기록과 사적 경험, 그리고 망상을 넘나들며 인간과 개, 그리고 비인간이 함께해온 순간을 추적한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인 개(도도, 루드밀라, 밤세, 솜똥 그리고...)와의 관계에 천착하는 과정은 타자를 타자로 두되 그 거리감을 좁혀보려는 시도 아닐까. 타자로부터 영향 받고 싶은 마음은 애정일까, 용기일까. 이는 인간과 동물에 관한 어떤 윤리적 명제에 기대거나 각각의 모순을 지적하기보다, 누적된 시간에서 변화해온 관계 속에서 어떤 명제를 만들어가는 작업 같기도 하다. 한 문장에서 시작하는 재현은 짜임새를 만들어주는 대신 재현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설정짓기도 하기 때문이다. 후자, 즉 재현될 수 없거나 재현 불가능성을 자처하는 것들은 때때로 타자라고 불린다.      

 

여진은 할아버지 종웅에게서 어떤 문장을 발견한 듯하다. ‘후천적 청각장애와 뇌손상 경험을 가진 종웅은 길가에 버려진 것들을 자원 삼아 그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예술가이기도, 영화 속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웅처럼 보이는 인물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 문장을 비껴나는 비릿한 사건이 발생한다. 종웅으로부터 제멋대로 고쳐 완성시킨 시계를 선물 받다가 썩은 매실청을 건네받은 여진의 혼란은 문장 밖 타자를 맞닥뜨린순간과도 같다. 타자는 이미 구축된 자신의 재현 세계-내-문장을 변화시키는 바깥의 존재다. 여진이 종웅에게서 발견해낸 문장은 어떻게 변화해갈까. 혹은 여진과 그 문장의 관계는 어떻게 달라질까? 여진은 그 변화에 어떤 영향을 받을까? 이와 같은 질문을 촉발시키는 타자와의 만남은 한 개인의 신체 안에서도 작동한다.

한솔은 여성으로 시작된 신체에 부여된 문장들을 비껴난 경험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신체를 재서술해가는 이들을 만난다. 타자는 서로를 재서술하게 만들면서 각각이 내재한 문장 혹은 경계를 무화시킨다. 그 해체-재배치의 과정은 고통스러우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한다. 한솔이 만나는 이들의 경험은 그렇게 그의 세계까지 침투하여 질문을 만들어낸다. 전시장 속 거울의 뒷면, 퍼포머들의 몸과 미디어 속 남성들의 몸이 경합하는 콜라주는 얼핏 동화되는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균열과 간극을 상처처럼 드러낸다. 거울은 막다른 골목, 문턱, 경계로서 위치한다. 퍼포머들 각각의 신체는 여러 세계가 뒤엉킨 질문의 장이 된다.      

 

새훈은 이를 스크린 안팎의 대화로 구현해간다. 경계를 강화하는 재현이 그 안에서 좌표를 찾지 못하는 이들을 외면하는 상황, 즉 기존 지배적 재현이 퀴어를 단일한 개체로 만들어 퀴어되기가 멈춰버릴 상황을 경계하며, 새훈은 구체적인 경험들과 ‘망설이며 뱉어내기’, ‘계속해서 움직이기’, ‘우발적으로 튀어나오기’ 등을 시도한다. 상호대항하는 말타래의 비선형적 전개는 함께 헤매고 끊임없이 서성이는 무지의 세계에 거주하자고 제안하는 것만 같다. 이는 모니터, 트램펄린 등과 결합하여 살(la chair)의 경험으로 확장해간다. 매체들이 배우가 되어 펼치는 이 공연에서 관객의 신체 또한 매체로서 초대받는다. 기울어진 채 흔들(리)며 만들어내는만들어지는 떨림이 공간을 채운다. 

 

어쩌면 그 공간 속 진동은 한솔에게 있어서는 질문이 요동치는 신체, 여진에게 있어서는 개연을 벗어난 낯선 사건을 만난 기존의 문장, 권동현×권세정에게 있어서는 개와 인간의 관계가 기존의 종 담론에 잡아먹히지 않고 동시에 개별화되길 바라며 쓰는 개견의 역사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이름 속 양립할 수 없거나 심지어 적대 관계인 것들과의 함께 살기, 즉 공거(co-habitation)를 고민하는 각각의 작업 속 우리*가 이번 전시를 통해 또 다른 관계 맺기를 서로 시도한다. 합정지구에 잠시 머무른 배아가 관객을 만나 제각기 다른 관계를 생성하길 바란다.

“진리를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어휘로써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면, 로티의 말처럼, 흥미로운 철학은 더 이상 찬반의 논의일 수 없다. 이 경우 흥미로운 것은 낡은 어휘들을 가로질러가는 새로운 어휘들의 사회적 실천이며, 그 변화이며, 그 변화와 더불어 생겨날 인간의 원래적 가능성으로서의 급진성이다.”

- 김영민, 『세속의 어긋남과 어긋냄의 인문학』, 글항아리, 2011, 121쪽

{이 서문은 새훈이 주도적으로 작성했지만, 나머지가 지적하고 서로 참견하며 쓰인 뒤범벅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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