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주 개인전
지진계들
2020.9.18 -
10.18
지진계는 지진을 감지하는 장치다. 지진계의 무게 추 끝에는 펜이 달려 있어서, 미세하게 흔들리는 땅의 움직임에도 바로 반응하여 종이 위에 기록한다.
작가 김진주는 레바논의 수도인 베이루트에서 지진계가 남긴 오래된 기록을 발견한다. 색이 바랜 기록지에는 서로 같으면서도 한 번도 같아 본 적 없는 순간들이 새겨져 있다. 이 오래된 흔적은 미약한 심장 박동이나 저 너머에서 흐릿하게 떠오르는 가느다란 능선처럼 얕게 진동한다. 지진계는 예측할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는 다른 차원의 계시를 받아들이듯 쉼 없이 작동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계시는 쓸모를 다하고 방치되었다. 한 때는 지진을 예측하기 위한 자료로 쓰였겠지만, 그 위로 쌓이는 다른 기록 아래서 어떤 과거로 오래 잠들어있었을 것이다.
작가는 먼지 쌓인 기록을 꺼내어, 과거로부터 전해진 계시를 더듬어본다. 어떤 순간에는 작은 점에서부터 솟아나 종이 위를 길게 가로지르고, 어떤 순간에는 기록지를 넘어서 크게 흔들리기도 한다. 작가는 지진계가 새긴 지점을 따라 손을 위에서 아래로, 좌에서 우로 바삐 움직이며 두 권의 수첩에 옮겨 낸다. 계시를 옮기던 몸, 그 위로 작가의 손이 교차한다. 그리고 오래된 계시는 작가의 몸을 빌려 새하얀 전시장의 벽, 텅 빈 기록지 위에서 다시 진동한다.
전시장에는 베이루트의 기억보다 조금 더 오래된 기억들이 공존한다. 약속을 말하는 거울, 세월에 생채기 난 투박한 장기판, 방진복을 입은 뒷모습, 여러 번 눌러 접은 종이, 오래 쓴 수첩, 뜨개질로 엮은 컵, 작은 손가방, 색유리를 투과한 오색 빛 ...... 작가가 지난 활동 동안 선보였던 구작들이다. 작가는 작업을 유물로 삼아 역사가 그리는 선형 궤도에 가두거나 어떤 위계로 줄 세우지 않는다. 대신 이미 세상에 선보여졌던 이들이 전에 경험해 본 적 없는 공간에 몸을 기댈 수 있도록 세심하게 그들의 자리를 마련한다. 때문에 이 전시에서는 작가의 전작이 모여있다면 한 번쯤 상상해 볼 법한 연대기로서의 동선은 그려지지 않는다.
대신 이곳에선 손이 지나간 궤적이 더 선명하다. 푸른 장갑을 낀 손, 글씨를 그리는 손, 창이 없는 창문에 커튼을 다는 손, 오래된 사진 속의 손과 그 손을 따르는 손, 종이를 접는 손과 펼치는 손, 공간을 만드는 손, 다시금 계시를 옮기는 손 ...... 작품이 놓인 곳마다 작가의 손이 부지런히 움직인다. 손을 움직일 때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긴장과 이완이 계속해서 반복해서 새겨진다. 어느새 말을 잊을 때까지 그 순환은 반복된다. 작가의 반복은 표면을 균일하게 정돈하고 애써 다듬는 일이 아니다. 도리어 삶의 표면 아래에 잠재된 균열을 감각하고 그 질감을 드러낸다. 시간으로부터 속절없이 휩쓸려 앙상하게 드러난 세월의 흔적까지 기꺼이 더듬는 일이다.
이 전시는 그간 작가가 손으로 매만지고 새기고 그려 넣으며 이어온 기다란 능선 위에 있다. 작가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부터 알지 못하는 삶까지, 몸을 기대고 그 생의 파동을 감지하여 그려낸다. 그렇게 그려 온 세계는 얕게 진동하며 공간을 온갖 생의 질감으로 채워 넣는다. 그래서 작가의 미술-하기는 촉각으로 육박한다. 눈으로 쫓다 보면 어느새 손 끝에 닿는다. 비단 사물을 감각하는 행위뿐만 아니라 몸과 손 위로 자신을 교차하여 상상하는 촉각이 함께 동원된다. 땅으로부터 전해지는 계시를 옮기던 몸이 그러했듯, 작가의 손은 쉴 줄 모르고 삶 위에 질감을 새긴다.
_ 서다솜(합정지구 큐레이터)
설치 : 권동현
촬영 : 홍철기
디자인 : 톱니귀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수원문화재단, 마포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