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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들여다보다 

 

 

 초목이 우거진 사이로 검은 구름이 솟구친다. 마치 묵인했던 사고가 결국 걷잡을 수 없이 커지듯 연기는 점차 몸을 불리며 세상의 절반을 뒤덮는다. 그리고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다. 언제 그들의 평온함을 해칠지 모르는데도 아무런 웅성거림 없이 그늘져가는 저 편을 그저 바라본다. 색도 형도 없이, 어쩌면 검게 타오르는 연기만큼이나 불길하게 땅 위로 드리운 그림자들은 턱 끝까지 어둠이 밀려온다면 사라질 것이다. (〈관람자들 13〉) 담담하게 쌓은 화면 위로 불길함이 도사리는 이러한 ‘풍경’은 전은희가 포착한 ‘오늘’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전은희 개인전 《말 없는 눈》은 앞서 서술한 〈관람자들 13〉의 풍경처럼 세계 어디에선가(또는 어디에서나) 벌어지는 공포와 위험을 타인의 사정이라는 이유로 먼발치에서만 바라보는 ‘관람자’로서의 자신을 인식하며 출발하는 전시다. 2018년까지만 해도 전은희는 주로 사람이 만들어낸 사람 없는 풍경, 시간의 때가 묻어 낡은 사물을 그려왔다. 인물의 존재가 두드러지는 최근작의 경향은 어쩌면 갑작스러운 ‘경로 변경’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작가는 오랜 시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장면을 수집하며 그동안 침묵해온 삶에 대한 작업을 천천히 준비해왔다. 그리고 10년에 가까운 작가 생활에서 항상 ‘관람자’였다는 자기고백과 함께, 화폭 위에는 세상의 다른 풍경이 담기기 시작했다.   

 

 전은희가 주목하고 그려내는 사람들은 전쟁과 내전, 폭력과 강압, 착취와 탈취에 의해 자신의 터전에서 내쫓기거나 불합리한 조건에서도 살아남아야만 하는 환경에 놓여 있다. 그 곳에는 차디 찬 겨울밤을 맨 몸으로 부딪히며 열기를 씻어내려는 사람도 있고(〈열기〉), 앙상한 병상에 걸터앉아 휴식의 겨를을 찾아낸 사람도 있다.(〈휴식〉) 폭격으로 반쯤 무너져버렸을〈집〉이나 〈공습〉으로 먼지와 잿더미가 뒤엉켜 앞을 분간할 수 없는 거리는 뉴스를 뒤적거리다 보면 한번쯤은 눈길이 갔을 법한 장면이다. 

 

 이들이 처한 상황은 위태로울 수 있지만 전은희는 현실의 치열함을 극적으로 묘사해내지 않고 타인의 삶을 공감하는 방법으로서 ‘그림/그리기’를 숙고한다. 그는 자신이 그려낸 풍경과 사건을 세심하게 기억하지만 그림 앞에 ‘사연’이 먼저 나오는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피해당사자를 지시하는 직접적인 말과 이름, 형체는 조심스레 걷어내고, 인물이 처한 상황이 ‘나’를 포함한 그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문제라는 점을 주목한다. 이처럼 그가 담아낸 풍경은 기념비가 된 죽음이라기보다 지독하지만 살아내야 하는 모든 이들의 현실에 가깝다. 허름한 뼈대가 몸을 바로 세우지 못하고 파편 위로 뒤얽히고 겨우 문짝 하나만이 건재할 뿐이라도, 그들이 딛고 선 폐허는 은유적 세계가 아니라 저마다의 삶이 계속되는 〈집〉이다. 

 

 〈집〉을 나선 이들의 무표정한 얼굴 위에도, 잿더미에 휩쓸린 군중 속에도, 엄습하는 불안감을 그저 바라만 보는 ‘관람자’ 무리에도, 불길을 뒤로하고 일렁이는 그림자 위에도, 어느 곳에나 누구든 비춰질 수 있다. 그 곳에 가장 먼저 비춰지는 건 아마도 작가 자신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에서는 어떤 시의 구절처럼 “나는 어쩔 것인가”라는 고민과 공감이 겹쳐 보인다. “나는 어쩔 것인가” 그 말에는 어쩌지 못한 죄책감과 어찌하고픈 애타는 마음이 뒤섞여 있다. 번듯한 추모비 하나 세울 수 없는 좁은 땅 위에 빽빽하게 새겨진 이름 없는 죽음을 견뎌내는 “저 고요”를,  “저 아우성”을 들여다보며, “나는 어쩔 것인가” (〈garve〉) 

 

 그런 오랜 질문과 고민이 뒤섞인 작가의 붓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종이 위로 묵묵히 스며들고 서서히 단단해진다. 이처럼 그의 그림/그리기는 세계에 대한 거침없는 폭로가 아닌, 잿더미가 되어버린 삶을 담담히 복구하는 일에 가깝다. 누군가의 인생을 엄숙하게 압도하는 사건이 아니라 묵묵히 곁을 지키며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바람인 것이다. 마치 불을 들여다보는 일처럼, 그저 고개를 돌리면 피할 수 있는 불편한 열기를 감내하며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곁에 있기를 자처한다. “나는 어쩔 것인가” 이 자기 반성적인 질문은 작가 자신에게서 출발하다가 어느 순간 그림을 마주한 ‘나’를 향한다. 저 너머에서 물끄러미 불길을 피하는 ‘말 없는 눈’을 깨우려는 듯, “저 고요”와 “저 아우성” 속을 자꾸만 들여다보게 한다.  

_서다솜(합정지구 큐레이터)

사진 : 권도연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_서울특별시_서울문화재단

전은희 개인전

말 없는 눈

2020.1.10 -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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