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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색깔들

 

제임스 H. 채의 작업은 상업 이미지 프로덕션, 미디어의 사회적 영향과 빠른 기술 변화에서 비롯된 주제들을 다룬다. 이러한 제임스 작업 중심에는 오늘날의 세계를 구성하는 무수한 변화들로 인한 극심한 불안이 있다. <진짜 색깔들>은 지난 2년간 이와 같은 관심사를 관통해 온 작가의 여러 작업들을 한 자리에 모은 전시다. 이번 개인전에서 선보이는 작업들은 한 가지 기본적인 규칙을 바탕으로 창작되었는데, 그것은 작업의 주요 빛깔을 빨강과 파랑 두 가지 색으로만 제한한 것이다.

 

파랑과 빨강. 빨강과 파랑. 이 두 가지 색깔에는 의미와 상징주의가 가득차 있다. 흔히들 하는 이야기로 젠더를 나누는 방식만 봐도 이 두 색깔은 확고하고 변함없는 의미로 규정되어 있는데, 남성은 파랑으로 여성은 빨강으로 의식된다. 또 다른 예를 살펴보면, 중국에서 빨강은 복을 상징하지만, 여러 문화들을 따라 이동하면서 이러한 상징은 퇴색되기 마련이다. 이렇게 내가가진 주요 관심사는 어떻게 이미지가 진실(이라고 믿는바)을 만들어 내는지다. <진짜 색깔들>을 통해서 작가는 진실, 허구, 실재, 가짜, 정직성, 비정식성, 자연스러움, 인공, 생생함과 죽음의 여러 강도들을 다각도에서 지속적으로 밀고 당기다가 단 한 순간의 이미지를 통해 보여준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색의 진실들은 상징적인 연결성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파랑/빨강 정물> 연작은 사실적인 재현을 통해 “인생의 무상함”을 묘사하는 바니타스화Vanitas Painting의 연속선상에서 만들어졌다. 이 작업이 만들어지기 전에 발표했던 <무한한 프로덕션> 사진 시리즈는 제품의 포장 미학을 강조한 작업이었다. 그리고 <파랑/빨강 정물> 연작은 그보다 더 “전통적인” 오브제의 선택과 구성을 보여준다. 이 사진들은 물질의 진실성을 탐구하는데, 사진에 찍힌 정물들은 모두 가짜 꽃, 가짜 과일과 가짜 나뭇잎이다. 그리고 이미지에서 오브제의 정확성은 파랑과 빨강의 진실성에만 기대어 재현되는데, 이는 이 이미지들은의 카메라와 디지털 프로덕션을 통해 고도로 조작되어 재현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색깔들은 “실재”를 배신하지만, 오브제의 형태나 물질을 배신하지는 않는다. 채도와 명암의 조정이 뒤섞인 이 조작의 방식은 나에게 있어 ‘파랑’과 ‘빨강’에 결부된 상징성과 정의가 이동하는 방식과 유사 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색의 진실들은 이미지 밖의 문화적인 힘이 지닌 강약에 관계없이 표류한다.

 

우리는 시각을 중심으로 색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또한 보는 것이 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사진을 보여주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는 말은 누군가의 진실성을 시험할 때 쓰는 흔한 표현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인식을 깨트리기 위해선 그다지 어려운 철학적인 논쟁조차 필요 없다. 남선우가 에세이 <빨강을 찾아서>에서 쓴 것처럼, 색깔들이 단어로 번역되면, 그 의미는 역사와 문화의 흐름을 따라 이동한다. 색깔은 또한 물리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며 민구홍이 보여준 운에 맞춘 단어들처럼 청각적이기까지 하다.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에 등장하는 세밀화가 오스만이 말하듯, 장님도 색을 느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색의 진실들은 감각적인 이해에만 매여있지도 않다.

 

대중문화에서 색에 대한 인식의 지점이 혼란으로 변모했던 사례로 #더 드레스 사건을 들 수 있다. 2015년 2월 26일 드레스 사진 한 장이 텀블러에 올라왔고 온라인에서 급속도로 확산되었는데, 왜냐하면 이 사진 한 장이 인간의 색깔 인지에 대한 불일치성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수 일간 사람들은 드레스 색깔이 검정과 파랑인지, 아니면 하양과 금빛인지 전혀 다른 의견을 두고 논란을 계속했다. 이 바보 같은 밈이 흥미로운 까닭은 인간의 보는 방식 에서 매우 구체적이지만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글리치/오류”가 있음을 알게 되어서이다. 이 바이럴 사건 이후로 여러 과학자들은 왜 사람들이 동일한 드레스 이미지를 두고 극명히 다른 인식을 하는지 여부를 설명하기 위해 진지한 리서치를 진행했다. 이렇게 색의 진실들은 과학의 발전 여부와는 관계없이 여전히 표류한다.

 

파랑과 빨강은 흔히 조화를 이루면서도, 동시에 직접적으로서로 대비되는 색깔들이기도 하다. 극명한 예로 대한민국 국기의 태극 문양에 사용된 빨강과 파랑이 있다. 또 다른 예로,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에서 파랑과 빨강을 주요 색깔로 사용한다. 두 색 모두 서로 대비와 동시에 조화를 만드는 개념을 상징한다. 다시 말해 이 색의 진실들은 서로의 관계 안에 매어있지 않다.

 

<진짜 색깔들>은 어떻게 진짜 색깔들이 생겨나는지를 질문하는 전시다. 바니타스 회화의 전통을 통해 최면을 거는 패턴과 몸의 조작들로 이루어진 일군의 작업들은 파랑과 빨강에 내재되고, 첨부되고, 연결된 의미의 다이얼을 돌리며 만들어내는 놀이들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러한 진실들이 전 세계 문명의 토대들을 겨냥한 다양한 문화들로 나타나게 될 때를 질문하고자 한다. 궁극적으로 의미는 보는 자의 눈에 달려 있다.

 

빨강을 찾아서

포털사이트 국어사전에서 ‘빨강’을 찾으려다 길을 잃었다. “빨간 빛깔”이라고 무성의하게 정의한 ‘빨강’의 의미를 알기 위해 다시 ‘빨간’을 검색하니, 이는 사전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동으로 대체 검색된 ‘빨갛다’와 ‘빨간색’은 둘 다 “피나 익은 고추와 같이 밝고 짙게 붉다”라는 의미를 가리켰다. 어떻게 밝으면서도 짙을 수 있을까, 피와 익은 고추의 색은 과연 똑같은가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 다시 ‘붉다’를 찾아보니 이번에도 비슷하게 “빛깔이 핏빛 또는 익은 고추의 빛과 같다”라고 적혀 있었다. 국어사전 안에서 ‘빨강’은 ‘빨간’에서 한번 휘청거린 후, ‘빨갛다’와 ‘피’, 익은 고추’와 ‘붉음’ 사이 어디쯤에 갇혀 제자리를 빙빙 돌 뿐이었다.

내가 사전에서 길을 잃은 것이 처음은 아니다. 남생이를 ‘Korean Terrapin’ 이라고 정의했으면서 Terrapin을 ‘북미 거북’ 이라고 칭하는 바람에 ‘코리안북미 거북’ 이라는 괴생명체를 만들어버린 『옥스포드영어사전』이나 포도를 ‘포도과의 나무’ 라고 표기한 『표준대국어사전』을 보았던 때처럼 심심한 실망감을 안고 다른 곳에서 빨강을 찾아보기로 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국의 화가이자 연구자였던 알버트 헨리 먼셀은 색의 속성을 일정한 척도로 체계화시킨 ‘먼셀 색상표’를 발표했다. 기본적으로 총 100개의 자리가 있는 먼셀 색상환에서 빨강의 좌표값은 5R. 이 토대 위에서 더 세밀한 단위로 색을 분류한 ‘대표색좌표값’에서 빨강은 7.5R 4/14이라고 한다. 마치 사람을 이름이 아닌 군번이나 수인번호로 부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으나 좌표로서의 빨강은 다른 색과의 차이만을 보여줄 뿐 빨강 자체에 대한 설명에는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고등학교에서 멈춘 과학 지식을 더듬어 순색의 빨강이 가시 스펙트럼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찾아보았지만 광학적 분류 기준도 제각각이었다. 그중 도서출판 예림이 2007년 발간한 『색채용어사전』이 가장 엄밀한 입장을 보였다.『두산세계대백과』가 스펙트럼 파장 620~760nm 까지를 빨강으로 지정한 데 비해, 630~700nm라는 좁은 범위 안에 빨강을 가두었으니 말이다. 한편 위키피디아는 625~740nm로 다소 절충적이었다. 적게 잡아 70에서 크게는 140 사이라니, 너무 허술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10억분의 1미터를 뜻하는 나노미터로 그정도의 범위를 가진 빨강을 집어내기란 야구 글러브를 끼고 좁쌀을 집는것 보다 어려운 일이 분명했다.

우리나라에는 색채 연구소가 있다는데, 여기서 발행한 책에 의하면 빨강은 “화려하고 대담하게 등장하며 사람의 기분을 한껏 고양시킨다.”1 다른 책에서 말하는 빨강은 “부정적인 사고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하며, 활기와 야망을 갖게 한다.” 2 문득 새해에는 부정적 사고를 극복하고 활기와 야망을 갖고 싶어져 휴대폰 배경화면을 빨간색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는 빨강의 효과 내지 특징일 뿐 존재에 대한 정의라고 볼 수는 없으며 효과 또한 유일하지 않다. 내 앞에 화려하고 대담하게 등장하여 기분을 한껏 고양시킬 수 있는 것은 빨간 색이 아니라 잘 담은 한 그릇의 어복쟁반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문학가였지만 자연과학과 철학에 대한 탐구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던 괴테는 1810년 『색채론』에서 적색은 “진지함과 위엄 뿐 아니라 호의와 우아함이라는 인상도 준다. 전자의 느낌은 이 색이 어둡고 짙어진 상태에서. 후자의 느낌은 밝고 옅어진 상태에서 주어진다. 그러므로 노년기의 위엄과 청년기의 사랑스러움이 하나의 색의 옷을 입고 나타날 수 있는 셈이다.” 라고 썼다.

국어사전에서 ‘빨간색은 밝으면서도 짙다’고 했는데 설마 괴테의 이론을 반영했던 것일까! 유명세에 비해 다소 직관적인 설명에 적잖이 실망했으나 사실 괴테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자연법칙에 도달하는 인지 수단으로 사유가 아닌 직관을 들었던 사람이다. 게다가 자연의 법칙이란 추상적인 수학적 정리를 통해서도, 개별 현상을 적립하여 유추하는 개념적인 사유를 통해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보편성은 각각의 개별성을 통해서만 보아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국어사전은 익은 고추와 피라는 개별성에서 빨강이라는 보편을 찾은 것인가!

“신께서는 자신의 창조물들이 피 흘릴 때 외에는 이 멋진 색을 보여주지 않으시지. 그래서 우리는 지치도록 인간이 만든 천이나 거장들의 그림에서 다양할 빨간색을 찾아다녀야 하는 것이네. 하지만 신께서는 바위 밑에 사는 희귀한 곤충에 그 비밀을 숨겨 두셨지” 

소설 『내 이름은 빨강』에서 16세기 이스탄불 궁정화가들이 빨강이라는 귀한 색채를 얻기 위해 찾은 것은 연지충이라는 벌레였다. 그들은 이 벌레를 잘 말려 빻은 후, 오랜 시간 끓이고 정제해 빨간색 염료를 얻었다. 과한 유비일지 모르겠지만, 감각적으로 인지되는 개별적인 것들에서 보편성을 찾아내려는 괴테의 사유가 절대적인 빨간색을 만들기 위해 개별적인 사물들을 찾아 헤맸던 화가들의 노력과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에서 이 빨간색 은 많은 화가들의 망설임과 고민을 일축하는 단 하나의 완전한 빨간색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벌레를 말려 빻아 끓이고 정제한 색이 유일한 빨간색이라면, 나는 빨간색을 본 적이 있을까? 연지충은 중앙아메리카 습지에 서식한다는데?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니 빨강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색이 대충 보아도 개는 눈에 들어왔다. 바닥의 카펫, 점원의 앞치마, 각설탕을 싼 종이, 커피 머신의 전원 버튼, 물이 뜨겁다는 의미로 붙인 스티커,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지갑, 그리고 카페에 있는 모두의 입술까지 말이다. 연지충을 말려 빻아 끓여 정제한 색 외에도 수많은 빨강이 존재했다. 이 빨강은 정말 빨강일까, 빨강을 흉내 낸 아류일까, 대략 그 안에 들어오면 빨강이라고 부르는 커다란 과녁이라도 있는 걸까. 지금 빨간 카펫 위를 무참히 질주하고 있는 황토색 플라스틱 몰딩과 비교해 보면 카펫은 빨간색이 분명하다. 그러나 약간의 갈색 기운이 섞여 있는 저 카펫이 빨강이 아니라면, 그것이 빨강이 아님은 황토색이 빨강이 아닌 것과 다름 없을 것이다. 고래가 물고기가 아닌 것은 얼룩말이 물고기가 아닌것과 같지 않은가?

갑자기 나는 한 번도 순수한 빨강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에 조급해졌다.

새해 부적처럼 바꾼 핸드폰 배경화면이 진짜 빨강이 아니라서 효험이 없을지도 모른다니, 구글을 열어 ‘pure red’를 검색했다. 이럴수가, 가장 위쪽에 자리한 10개의 이미지가 육안으로도 전부 다른 색이었다. 다시 인스타그램에 #red를 검색하니 1억 개의 게시물이 나왔는데 역시나 제각각의 이미지와 제각각의 빨강이 등장했다. 유튜브 상단을 가득 채운 테일러 스위프트의 ‘Red’ 중 하나는 1억 5천 8백 9십 2만 9천 3백 5십 7뷰였는데, 빨강을 찾는 사람이 나 외에도 이렇게 많은 것일까. 너무도 당연한 빨간색이었는데 갑자기 무엇이 빨강인지 모르겠는 지경에 이르렀다. 포토샵을 열어 R100으로 배경을 채우고 한참을 쳐다보았다. 연지충을 말려 빻아 끓여 정제한 뒤 이 화면 위에 한번 발라보고 싶었다. 바른 줄도 모르게 색이 같을까? 막상 발라보면 전혀 다른 것이 아닐까?

 

11세기 프랑스 철학자 로스켈리누스가 설파한 유명론에 의하면 실재하는 것은 개체일 뿐 개념이 아니다.

‘빨강’이라고 하는 보편적 개념은 많은 ‘빨간 것’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성질에 주어진 기호이며, 실재하는 빨간 것을 떠나서 빨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여기에 기대어 내 눈앞의 일곱 가지 빨간 사물을 보며 안도해도 되는 것일까? 그런데 저것들의 공통점에 하필 ‘빨강’ 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빨강의 ‘빩-’은 밝다, 붉다와 동계의 음운으로, 이들은 모두 불(火)을 어원으로 갖는다고 한다. 불의 밝음과 뜨거운 속성이 색채 감각으로 전환되어 발달한 형용사가 붉다와 밝다이고, 여기서 ‘빨갛다’와 ‘빨간’이, 그리고 이것이 명사화 되어 ‘빨강’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빨강은 명사로 지시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이전에 형용사로 지시할 수 있는 상태가 먼저였다는 것인데, 상태라는 것이 존재보다 선재할 수 있을까? 그런 상태를 가진 존재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호기로운 탐정처럼 빨강이라는 존재 혹은 상태를 이리저리 추리했으나 점점 미궁에 빠질 뿐이었다. 두서없이 빨강을 찾아다니고 빨강만을 생각하다 보니 빨강을 사랑하거나 빨강에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빨강은 이렇게 자기를 찾는 이들을 매혹해서 잡아먹는 괴물, 혹은 괴물같은 상태가 아닐까?

“게리온은 괴물이었네 그의 모든 것이 빨강이었네

아침에 이불 밖으로 코를 내밀었네 빨강 코였네

그의 소떼가 빨강 바람 속에서

족쇄를 끌고 다니는 빨강 풍경은 얼마나 거친지

빨강 새벽에 파고들었네 젤리 같은 게리온의 꿈” 

물론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다.

 

 

파랗게 들리는 듯한

2009년 인도 출신 미국의 화학자 마스 수브라마니아(Mas Subramania)는 자신의 연구진과 인망 블루(YInMn Blue)를 발명했다. 이트륨(Yttrium)과 인듐(Indium), 산화망가니즈(Manganese Oxide)를 고온으로 가열하던 과정에서 우연히 탄생한 결과물은 이제껏 본 적 없는 진하고 밝은 파랑이었다. 1802년 프랑스의 화학자 루이 자크 테나르(Louis Jacques The-nard)가 코발트블루(Cobalt Blue)를 발명한 지 약 200년 만이었다.

2017년 11월 크레용 제조 회사인 크레욜라(Crayola)에서 인망 블루를 사용한 크레용 ‘블루티풀(Bluetiful)’을 막 출시한 무렵 국제 색채 협회(Association Internationale de la Couleur, AIC) 사무국에 논문 한 편이 투고됐다. 기원전 2,200여 년 전 최초의 인공 안료인 이집션 블루(Egyptian Blue)를 발명한 이집트인들에 대한 헌사로 시작하는 논문은 『궁극의 압운 사전(The Ultimate Rhyming Dictionary, https://www.rappad.co/rhyming-dictionary)』에서 제안한 ‘블루(blue)’와 각운이 어울리는 단어 231가지를 제시하며 눈에 보이는 파랑이 아닌 귀에 들리는 파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문장은 나무랄 데 없었지만 과학적 근거가 빈약한 논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없었다. 여기에는 다소 시적인 제목도 한몫했을 것이다. 학회 관계자로 추정되는 이가 논문에 관한 이야기와 논문 전문을 레딧(Reddit)에 게시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논문이 어울릴 만한 곳은 학회가 아니라 힙합 클럽일 거라는 누군가의 의견은 그저 실없는 농담으로 치부됐다. 차라리 비영리 예술 공간은 어떻겠느냐는 의견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글은 논문이 제시한 단어 231가지를 인용한 것이다. 제목 또한 논문의 것을 그대로 따랐다. 1810년 독일의 철학자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색채론(Zur Farbenlehre)』에서 사람들이 파랑을 좋아하는 까닭에 관해 “우리를 나아지게 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잡아 끌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파랑의 위치는 공기 속을 전해오는 파동보다 빛의 굴절률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괴테의 오랜 격언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알파벳순으로 나열된 단어들을 읊조릴 때 파랑은 파란 스키틀스(Skittles)나 블루 라즈베리 셔벗(Blue Raspberry Sherbet)보다 얼마나 더 파랄까? 이 글을 읽는 장소가 힙합 클럽이라면 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아닐 것이다. 물론 비영리 예술 공간이더라도.

협업 : 남선우 Sunwoo Nam, 민구홍 Guhong Min

아트디랙터 : 발랜틴 카스텔 Valentine Castille

어시스턴트 : 배소현

디자이너 : 제임스 채 James H. Chae

촬영 : 홍철기

제임스채 개인전

True colors

2019.2.15 -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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