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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여내 그린 그림에 대한 소고

 

 

작년 이맘때 쯤이었다. 후끈거리는 더위가 시작될 무렵, 이해민선의 성산동 작업실을 갔다. 작업실에는 허연 바탕에 옅푸른 붓 터치들로 이뤄진 창백한 풍경들이 시작되고 있었다. 기존에 해오던 작업을 방 한구석으로 몰아둔 채, 작가는 화학약품을 들고 사진을 녹여내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 녹여낸 잉크로 캔버스 위에 사라진 풍경을 다시 그려내고 있었다. 방독 마스크를 쓰고 독한 약품의 냄새를 참아가며 왜 그렇게 사진을 지워내는지 의아할 뿐이었다. 뭔가에 홀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해 보였다. 이미 있던 풍경을 애써 지워 내고는, 다시 되살리려 안간 힘을 쓰다니... 배가 침몰한지 두 달째였다. 분노와 애도, 거기다 무기력해진 삶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때였다. 일년 후, 다시 들른 작업실 바닥엔 여전히 각종 잡지들과 지워진 사진 이미지들이 두둑히 쌓여 있다. 작업실에는 물감 대신 녹여낸 사진잉크로 그려진 풍경들이 가득하다. 이해민선이 이렇게 하나의 매체에 고집스러웠던가. 드로잉, 회화를 주로 선보여 왔다지만 그는 중간 중간 끊임없이 딴짓들을 벌여왔다. 자연과 인공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드로잉, 회화, 프린트, 설치, 영상, 사진 등 여러 매체를 유희하며 밝혀온 그이다. 근래엔 주어온 나뭇가지들을 나무젓가락으로 지탱시킨 설치를 선보이기도 하였다. 이번에도 그 딴짓을 벌인 걸까. 작업의 사이사이 걸쳐 나오던 딴짓이라 하기에는 몰입의 강도가 다소 무겁다. 

 

사진 잉크를 녹여낸 작가의 작업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몇 해전 어느 그룹전에서 그는 잡지의 건물 사진을 녹여 돌산으로 드린 드로잉들을 전시했다. 2007년부터 해온 사진 드로잉이 이번 신작의 시작이 된다. 당시 잡지 사진을 녹인 드로잉에는 주로 고층건물 사진이 등장한다. 게 중엔 돌부처 사진도 있으나, 이 모든 욕망의 구축물은 원형으로 회기 하듯 바윗덩어리로 녹여진다. 장엄히 구축된 수직적 건물은 한낱 부질없는 허상마냥 돌덩어리로 돌아간다. 인공물과 자연물이 서로 뒤섞인 기이한 풍경은 이상하리만큼 친숙하다. 그간의 여러 작업에서 그는 이 둘 사이의 상호적 관계를 지지하고, 공존 가능한 균형을 조율해왔다. 그래선지 도시 속 헐거벗은 돌산의 등장 또한 낯설지 않다. 녹아내린 문명의 살갗만 같다. 

 

사진을 ‘녹여낸다’는 말은 이해민선이 사용한 것이다. 잉크를 지워낸다기 보다는 ‘녹여내어 그린다’는 상황이 강조된 것이다. 사진의 녹여진 잉크가 내내 맘에 걸린다. 완전히 지워진 것도 아니고, 사라진 것도 아닌 어떠한 다른 상태로 변모되기 위한 이 중간 단계로서의 상태 말이다. 본디 ‘녹이다’는 표현은 고체의 물건을 액체화할 때 주로 쓴다. 작가가 잉크를 녹여내는 과정에는 인위적인 약품이 개입하고, 손의 강도와 움직임이 이를 조율한다. 그는 잉크가 녹여져 이미지가 사라지게끔 내버려 두지 않는다. 녹아내린 잉크를 가지고 붓질의 속도와 압력으로 조절하며 다시 되살려내려 애쓴다. 그의 작업에는 매번 다른 성질의 것들이 하나의 몸체 또는 풍경으로 작동해 왔다. 제압보다는 서로의 특성이 인정된 것이다. 이미지가 잉크로 변환됨은, 이미지가 물질로 전환됨을 의미한다. 그 과정에서 이미지가 물질로, 물질이 다시 이미지로 치환되는 상태 변화가 일어난다. 붓질은 이미지와 물질 사이의 전환을 이끌고, 서로 간의 긴장감을 조율해 낸다. 붓질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철저한 물질과의 싸움 후, 이번 그림이 나왔다. 

 

이해민선에게 그리기는, 곧 지우는 과정이다. 지우는 행위는 그가 작가로서 걸어온 시간을 모두 관통한다. 사진 이미지가 굳이 아니더라도 오브제, 영상, 설치 등 가벼이 등장해온 딴짓들이 지우는 과정 속에서 등장했다. 2006년에는 지우개로 지워 그린 드로잉이 있다. 밤하늘 사진을 지워 불꽃을 만든 작업, 전시를 취소하고자 한 마음에서 리플렛을 지워 추상적 이미지로 변모시킨 작업뿐만 아니라, 발표하지 못한 2005년 석고상 드로잉도 같은 맥락에 있다. 잡지의 연예인 얼굴사진을 지우개로 지워 각을 내 입시미술의 석고상처럼 그려낸 작업이다. 그가 작가로서 주목 받기 시점의 영상 작품 2005년 ‘멸치산수’ 또한 사라진 흔적의 산수화이다. 끊는 물속의 멸치들은 물이 증발되자 육수의 흔적으로서 산수화를 남기었다. 멸치의 즙이 그려낸 그림이다. 물성이 이미지화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2004년 그의 첫 개인전으로까지 거슬러 간다. 당시 선보인 ‘사라지는 그림’ (2001-2004)은 돼지사료 종이의 기름 성분이 그 위에 그려진 볼펜 드로잉을 흡수하여 점차적으로 희미해진 작업이다. 기름에 흡수돼 사라지던 볼펜 드로잉, 멸치 육수가 남긴 산수화 흔적, 이미지를 지우개로 지워 그린 드로잉과 근래 사진의 잉크를 녹여내 그린 드로잉까지... 십 년이 넘게 그가 틈 나는 데로 해온 딴짓들이 이번에 한데 만났다. 삶은 앞으로 걸어 나가는 듯 하다가도 매 순간 순간 과거와 만나진다. 빙그르르 순환의 물줄기를 타고 작가는 녹여내듯 지탱해 온 자기 자신을 만난다. 

 

“서울 강남역에서 경기도 외각으로 빠져나가는 고속도로를 타면 삐까번쩍한 건물들이 옷을 하나씩 벗듯 공사장의 맨몸이 드러난다. 외곽으로 갈수록 흙더미가 나타나고 중간 중간에 식물원, 석수장이 등등을 지나면 허허벌판 사이 사이에 용도 모를 기계들이 흙 속에 파묻혀 등장한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버스정류장에 멈춰설 때쯤 바로 그 앞으로 파해 쳐진 산의 단면이 나타난다. 처음에 본 건물들이 해체되고 갑자기 내장이 드러나는 느낌이다” 

(작가 인터뷰 中 , * a ) 

 

건물에서 공사장으로, 그리곤 방치된 중간지대에서 채석장으로. 이 풍경의 시퀀스는 이해민선이 이십 년이 넘게 보아온 버스 창밖의 시선을 따른다. 구축된 도시 이미지는 작가의 시선을 따라 점차적으로 붕괴해 나간다. 그의 표현처럼, 속살을 드러내 보인다. 응시된 풍경의 살갗과 속살은 그가 잉크를 녹여내 그리는 과정에 고스란히 담긴다. 살갗에 침투한 그의 그리기는 집요하게도 물성에 침투한다. 마치 이미지의 속살에 가 닿는 듯하다. 작가는 그렇게 이미지를 녹여내 모은 잉크로 기어코 한 덩어리의 물질을 만져 낸다. 녹아 내린 이미지가 시간 속에서 서로 엉겨 붙어 굳으며 순수한 덩어리가 되었다. 돌덩어리를 그리다 진짜 돌덩어리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 그리기의 과정 속에서 사물, 어떤 존재의 삶과 죽음이 진행된다. 시선, 이미지, 사진, 그림, 물성, 사물 이 모두가 살갗이 해체되고 생성되는 과정에 담긴다. “만들어지다 나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사무엘 베케트의 한 문구가 떠오른다. 베케트는 말들이 사라져버리는 무의 찰나에 이미지를 보았다. 이해민선이 체감한 ‘이미지를 훼손하면서 동시에 채집하는 느낌’이 그러하지 않을까. 작가는 그리기를 통해 소멸의 과정으로부터 재생의 에너지를 발견한다. 붓질에 녹여진 이미지로부터 단단한 돌덩어리 혹은 돌무더기 하나가 탁 하니 나왔다. 이 잉크 덩어리는 마침내 고속버스 창 밖으로 파해쳐진 채석장 풍경과 만난다. 이미지가 소멸하는 찰나, 이해민선의 그리기는 여기서 부터가 시작이다. 그는 이미지의 표면이 와해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내적 긴장을 붓질에 고스란히 담아낸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소멸로 가는 광폭의 에너지로부터 작가는 생의 순환을 발견한다. 이미지의 생과 사가 한데 얽혀 판을 뒹굴고, 이 모든 것들이 소진될 때쯤 진짜 그림이 나왔다. 이 순환의 과정을 겪으며 그의 그리기는 살갗의 무게로부터 한결 해방된 것일까. 녹여낸 채석장 풍경에 붓질의 강도가 힘 있게 모여든다.



 

* a 

 

1.강남역에서 경기도 용인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창가에 앉는다. 커튼은 치지 않는다.

번지르르한  빌딩들을 거쳐서 양재동 꽃시장을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타기시작하면  건설현장들이 보인다. 강남역의 그 견고한 빌딩들이 옷을 하나씩 벗으며 속살을 드러낸다. 마치 하나의 타임라인이 작동하듯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빌딩들은 중력을 거스르며 높이 쌓아지고 다시 무너뜨린다 (임대도시공간변이체 2001-2007).  

2.고속도로 가림막이 시야를 끊임없이 꼴라주 하면서 서울을 어느 정도 빠져나오면  정체모를 더미들 과 황량한 땅들이 펼쳐진다. 그 흙더미에 드문드문 박혀진 기계들은 무언가를 계속 ‘자연’ 일 수 있도록 유지 시켜 주나보다(장면 패키지 2008, 기계와 기예 2009).3.황량한 흙 밭에 서있는 왜소한 나무에 누군가의 의자가 동동 매어져있다 그 의자 뒤편엔 빨간 고무대야와 훌라후프와 입던 옷가지가 검은 비닐과 함께 어떤 ‘덩어리’ 로 앉아있다(직립식물 2010 ,2011).4.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소도시의 어딘가에 들어서면 멀리서 보아왔던 잘려진 산들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 정면으로 시야를 덮는다. 이젠 내장을 깡그리 드러낸 것이다( 물과밥 2012 , 2013).5. 잘려진 돌산은  세세하게 또  무자비하게 파여졌다.  그림 그리고 싶었다 .  차안에서 잠깐 지나치며 보아오기를 오랜시간 반복한 만큼 매번 그림 그리고 싶었다 . 그런데 그냥 그릴 수 없었다 .그냥 그릴 수 없었다는건 어쩌면 ‘그림’을 믿지 못 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야 그렸다 . 지금 생각해 보면 ‘그림 그리고 싶었던 것’ 이 아니라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 살갗의 무게 2015) 


 

돌산이 자신만큼 무겁고 거대한 것으로부터 훼손된다 

돌산 이미지는 자신만큼 가볍고 부드러운 액체로부터 훼손된다 

돌산은 훼손과동시에 목적에 맞는 물질로 채집 된다 

드드드드 쇠뭉치의 기계가 돌산에 반복적으로 내리 찍는다 

삭삭삭삭

나의 팔은 붓을 주먹쥐듯 웅켜잡고

이미지를 잉크를 힘주어 밀기를 반복한다 그들은 훼손시키는 액체와 섞여 몸집이 불어난다 

처음의 돌산 이미지는 액체가 되었다 

가  고체 덩어리로 한덩어리  질료로 목적없이 채집  된다 . 

질료는 이미지의 그것과 닮았다 .

 

높은 돌의 몸을 바람이 핥아 왔는데 

숫사자의 갈퀴도 바람이 가져갔다했다 

오래전 풍문으로만 듣던 문둥이는 풍문이 바로 제 몸이였다고 

바람이 뜨겁다 

_심소미(독립 큐레이터) 

 

디자인 : 강동형

이해민선 개인전

살갗의 무게

2015.7.17 -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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