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다
이 사람의 이번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이 사람의 이전 작업을 봐야 한다.
문명의 역사는 야만의 역사, 라는 말에 빗대어 말하자면 도시의 역사는 철거撤去의 역사다.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본다. 도시는 약탈-건설돼 확장되고, 더 확장되고, 끝까지 확장돼 외부가 없어질 때까지 자신을 확장한다. 지금은 그 확장이 수익성 있는 부동산을 대상으로 하지만, 앞으로는 말 그대로 공간적 영토의 한계까지 일 수도 있다. 전 국토가 도시화 된 도시국가를 보면 그 땅들은 국토나 영토라기보다 ‘부동산’에 가깝다.(‘부동산’의 꿈은 전 지구의 부동산화-자산資産화일 것이다.)
‘부동산화’ 된 땅의 한계에 다다른 도시는 내부를 확장한다. 이른바 재개발.
재개발은 당연히 앞선 ‘신축新築’을 철거한다. 새 건물은 더 새 건물 앞에서 낡은 건물이 되고, 낡은 개발은 철거 되며 더 새로운 ‘개발이 건축’ 된다. 그리하여 보다 더, 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면, 그러면 더 더 새 건물보다 더 더 더 새로운 ‘개발이 건설’ 되고, 그런다.
건축, 재건축의 순환이 빨라질수록 특정 공간 속에서 살며 형성된 우리의 기억, 추억, 그리고 회억回憶들은 돌아오지 못한다. 마치 바람에 의해 표변하는 모래언덕砂丘처럼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가는 주변 환경 속에서, 개별적이지만 근원적 기억들은 돌아올 ‘그 공간’이 없어졌으므로 돌아오지 못한다. 설사 돌아온다 한들 그것들조차 재건축된 추억일 것이다. 마치 TV쇼나 드라마에서 윤색된 노스탤지어처럼. ‘지금’은 전날의 기억과 앞날의 기억이 뒤섞이는 현장이고 과정이다. 그러므로 고유한 한 기억이 자본의 이동 속도 속에서 추상화되고 보편화 되며 집체화 돼 유실-망각되면, 삶 역시 포장되어 치워지거나 없는 미래로 발송된다. 스스로가 죽기도 전에 ( )자신에 의해 사라지는 것이다.
지난 2008년에 있었던 「기억의 리모델링」전에서 이 사람은 철거 직전의 현장에 가서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쓰던 것들을 가지고 그들이 생활했음직한 장면을 구성했었다. 그것은
-1. 신산스러운 철거의 흔적을 드러냈고-한 밑천을 잡았든, 어딘가의 입주자가 됐든 철거-난민이 됐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남긴 생활의 체액이 보이고, 또한 그 사람들이 그러한 것을 남기며 앞으로 갈 길을 보여주었으며; 그들이 남긴 그리고 남길 생활 문화가
2. 생활과 사람이 빠진, 그러니까 기운이 빠진 거주지가 역설적으로 생생하게 우리 문화의 키치 취향을 드러내고; 역사가 (거의)철거되어 자기 전통에서조차 소외된 문화적 난민들의 잡다다한 몰취미가 보여주는 비루함과 (다시, 거의)야만적 건강함이 보이고
3. 그렇게 그곳에서 살다가 흩어진 사람들, 이미 거기에는 없는 사람들, 그 사람들 없이 그들 과거의 일상을 무인극無人劇으로 구성함으로써 (일종의)유령을 불러 왔다.-
제의祭儀적 풍경이었다. 자본의 속도와 광휘에 들린 시대가 개별적 삶과 기억을 무차별한 개발과 재개발로 밀어버리고, 그리하여 사람들을 실체적 죽음과 의사擬似 죽음에 몰아넣은 그 위에 집단적 기억과 삶을 건설 했다면, 그에 맞서 그 개별적 상실을 보편적으로 위로-치유하는 것. 제사를 지내는 일-아니 제사를 지내는 것은 그 장면을 보는 사람 각자의 몫이었겠지만-그 제사의 자리를 차리는 행위. 그리고 그 차림, 상차림이라기보다 ‘집차림’은 집 잃은 자들을 위한 위로이자, 떠난 사람과 그들의 장소를 보는 사람들의 애도를 위한 자리이고 장면이었다. 혹은 이 사람이 생령(일종의 유령이라면 유령인)들을 불러들인 것은 남은 자들과 보이지는 않지만 ‘있는’ 그들이 모여 함께 ‘애도의 시간’을 갖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서로의 ‘너희’를 위한 애도가 아니라 바로 각 각의 ‘우리’를 위한 애도였으며 사실은 아주 조용한 굿이었을지도 모른다.
긴 시간이 지나고 이 사람이 다시 철거 직전의 현장, 살던 사람들이 떠난 현장을 간다. 가서 본다. 현장 자체는 당연히 칠년 전과 같다. 그것은 영원히 되풀이 될 것 같은 광경이다. 이 문명이 영원하다면 정말 영원히, 이 문명이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면 그 종막까지는 영원히 보게 될 것만 같이 징그럽게 익숙한 것.
다시 거기에서 이 사람이 본 것은 뭘까. 아직도 그곳은 여전한 서로, 우리를 향한 애도의 자리일까. 조용조용 무성無聲의 굿을 나누는 무음의 굿판일까.
애도는 끝났다. 애도는 총체적 기억이므로 인류가 단 한사람만 남아 있더라도 끝나지 않고, 끝 낼 수도 없지만 어떤 애도는 끝났다. 그걸 끝내기 위해, 그건 이제 끝났다는 걸 알리기 위해 이 사람은 새로운 유령을 불러온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있던 것의 유령이 아니라, 살아있지만 ‘없는’ 생령이 아니라 그 자체가 유령인 그런 것이었다. 그것은 그것이 자신의 자리에 실재적으로 있을 때는 공학적으로 아름답고 기계적으로 유용한 물건이다. 통칭 ‘트라이포드’라고 불리는 그것은 사전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의 된다.
“거센 파도나 해일에 의한 피해를 막기 위해 주로 항구의 방파제 좌우 바닷속에 집어넣는 시멘트 괴(塊). 사방으로 4개의 육중한 시멘트 다리(pod)가 뻗어나 있어 거센 파도에도 구르지 않아 파도의 힘을 중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이 불러온 유령은 이 테트라포드를 본 떠 실제 축적 몇 분의 일로 줄인 비닐로 만든 것이었다. 가볍고 투명한 물놀이 기구 같은 테트라포드. 이건 사실 테트라포드의 (시각적)허물이자, 유령이다. 그것은 자신의 실체와 정확히 반대로 작용한다. 무겁고/ 가벼우며, 실체적이고/ 비실체적이며, 물결을 막고/ 물결에 떠다니며, 부서는 지지만 터지지는 않고/ 터지지만 부서지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 이름의 역설이 본질인 그런 것이다. 이름과 실체의 모순과 긴장의 힘 때문에 가벼워지고 그 가벼움의 동력으로 기화氣化돼 유령이 된 (다소 희극적이고 언어-기계적인) 그런 유령인 것이다.
기시감인가 싶게 되풀이 되는 철거 현장에 이것, 이 테트라포드의 역전체가 놓이자 공간이 일변一變한다. 떠난 사람들이 서성일 것 같던 애도의 공간이자 버려진 공간에 자신의 역설로 긴장한, 긴장된 물체가 들어서자 어떤 ‘균열’이 생긴다. 이 틈을 통해, 그리고 그 틈에 의해 전형적이었던 그 공간이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으로 바뀐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이물체가 지워져가는 공간을 자신의 가벼움으로 복원시킨다. 이 물체를 중심으로 되살아난 공간은 의미론적으로 유동하는 공간이다. 실체적으로 부유하던 공간이 특정할 수 없는 의미의 공간으로 정착하는 역설의 순간이다. 자기 역설이 공간의 역설을 불러오는 힘. 비장하달까, 애절하달까, 어쩌면 진부한 철거 현장의 모습에 균열을 불러온 것은 형태적, 의미적, 촉각적, 그리고 장소특정적(여긴 어디, 나는 누구? 일까나ㅋ), 덧붙여 탈 인정人情적 대상이 던지는 유머다.
그걸 통해 제의적 애도의 자리가 아연 세속적 예술의 자리가 된다. 세속적 예술의 자리란 어디이고, 무엇인가? 그건 아마도 앞을 알 수 없는 난장亂場이고 규정할 수 없는 것들이 굼실거리는 곳일 것이다. 생성生成, 생성의 장면, 각자의 특별한 기억, 해석의 해석, 어디도 아니고 무엇도 아니지만 어디이고 무엇인 것. 초유의 것이고 최종의 것. 사실은 그것도 아닌 것이어야 하는 것. 진행되고 살아가는 전체이자 디테일. 그러니까 어쩌면 그것은 떠들썩한 굿판과 유사한 그런 자리일 것이다. 혼돈이 혼돈을 다스리고 추어대는 그런 노상路上. 사람은 물론 몸 가진 것도 아닌 콘크리트 덩어리의 허물이 들어서자 서서히 생기가 돌아오고 어떤 목소리들이 수런거리는 아이러니의 세계. /자본은 개발과 재개발로 자기 내부의 외부를 끝없이 만들어 낼 것이다. 자기의 외부가 사라질 때까지 무한히 철거할 것이다. 자신의 내부가 텅 빌 때까지. 오직 철거만이 역사가 될 때까지.
이런 세계의 폭력적 도착 속에서 그런 것들과도 더불어, 싸우면서 도망치면서, 자신의 ‘얼토당토아니함‘을 심화해 내야 한다. 그런 의무, 그런 예술의 권리를 ‘애정’한다.
우리 예술의 우주의 외부는 없어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외부가 없고 내부가 없다. 없으니 넓다. 안심하자, 고 괴상한 트라이포드의 유령이 처연하게 어쩌면 사뭇 의연하게 서 있는 광경을 통해 이 사람이 얘기한다.
_황세준(화가)
코디네이터 : 김하영
디자인 : 강동형
이지영 개인전
유영
2015.10.30 -
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