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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주 개인전

​거친 모래가 뱀의 머리에 닿지 않도록

2024.7.26 -8.18

절망은 만져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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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세 개의 시선, 혹은 어떤 가림막으로 구분된 세 개의 공간, 노예주의 회화에서는 이를테면 그것들 사이의 거리감이 밀고 당겨지는 서로의 힘에 의해 계속해서 변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를 지키는 우리는>(2024)과 <우리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2024), 그리고 <무고한 당신>(2024)은 어떤 인물들을 각각 그려내고 있는데, 무언가를 응시하는 한 사람의 시선이 각 화면에서 화면으로 연쇄를 이루는 것처럼 이어진다. 동시에,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 별개의 사건, 게다가 멈춤과 이동, 앉음과 일어섬, 외침과 침묵 사이에서 어떤 간극을 유지한 채, “여기”와 “저기”라는 (닿을 수 없는) 거리를 겹겹의 시선으로 에워싼다. 

   현실의 빛이라 하기에는, 좁고 어둡게 은폐된 공간을 열화상 카메라로 포착한 비현실적인 화면처럼, 짙은 청색의 어둠 위로 부유하는 보라 빛의 가벼움이 현실의 온기를 대신한다. 노예주는 <서로를 지키는 우리는>에서, 시위 현장에서 자주 만난 한 사람의 앳된 얼굴과 피부 위 타투 모양과 밝게 염색한 머리 색깔을 그가 본대로 그렸다. 응집한 시위 현장의 대열 한복판에서 스스럼 없이 운동화 끈을 고쳐 매는 동료 활동가의 옆 모습은, 어둠 속의 빛처럼, 절망스러운 현실의 빈 칸을 충실하게 채우기 위한 형상 같다. 

   <우리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는 다르다. 그 어떤 무기 보다 날카롭게 보이는 카메라를 높이 치켜 든 얼굴은 정면을 향해 있지만, 얕은 그림자의 어둠과 굴절된 안경 너머로 흐릿하게 감춰져 있다. 얼굴도, 피부도, 머리카락도, 검정과 노랑의 보색 대비에 묻혀 도통 모를 부재와 불안에 대해 환기시킨다. <무고한 당신>은, 몸을 틀어 화면의 왼쪽을 향해 걷고 있으면서도 반대편 어딘가 멈춰 있는 곳에 붙잡힌, 분리된 시선을 좀체 거두지 않는다. 

   하나가 짙은 어둠과 숱한 응시에 맞서 (보이지 않는/볼 수 없는) 제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형상이라면, 나머지 둘은 텅 빈 시선처럼 (본다는 것을) 제 스스로 박탈당한 침묵의 표상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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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주는 활동가다. 그는 또, 시위 현장에서 수많은 타인들과 연대하며 보내는 낮과 밤의 시간 못지 않게 일상의 많은 시간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린다. 둘은 엇비슷하게 서로 닿아 있는데, 그가 그린 그림의 대부분은 시위 현장에서 찍은 사진들과 엮여 있다. 시위 현장의 급박함과 공포뿐만 아니라, 밥 먹고 이야기 하고 소박함을 나누는 행위들까지, 그의 사진에 남아 있는 현장의 순간들은 위험을 알리는 재난 경보였다가 아무 기척 없는 일상이 되기도 한다. 

   장애인 차별, 성매매 집결지 강제 폐쇄, 재개발 강제 철거, 임대 계약 강제 퇴거 등 차별과 폭력에 맞선 시위 현장부터 인권 및 동물권 운동 현장에서, 그는 활동가로 연대하며 그 안에서 보고 듣고 만지고 부딪히고 냄새 맡았던 일련의 경험과 기억을 캔버스 앞에서 복기한다. 그가 경험했던 일들에 관한 기억과 그가 찍은 사진을 비틀고 중첩시켜 연결하는 이 그리기의 행위는, 소음과 침묵 사이에 켜켜이 쌓인 (말할 수 없는) 재난의 이미지에 다가간다. 현실의 가장자리, 더 오래되고 더 낡고 더 작고 더 흐릿한 이/것들이 겪고 있는 현실의 재난은, (소멸할) 기억을 지속시킬 (재현 아닌) 감각의 표상에 맡기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말하자면, 어떠한 말로도 서사화/상징화 하기 어려운 재난의 구조는, 사실과 상상을 유사한 감각으로 선회하는 이미지를 관통함으로써 (불완전한) 기억처럼 지속될 명분을 찾게 될 테다. 

   <사람 있어요>(2024)를 보면, 파란색 계열의 추상적인 붓질이 전부인 것 같은, 형태를 식별하기에는 다소 흐릿하고 다소 뒤엉켜 있는, 추상의 선과 면(의 균열) 사이로 정말 사람이 있다. 무언가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 손, 투명한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볼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처지의 저 두 사람(혹은 셋, 넷…), 실체는 알 수 없지만 균열의 흔적이 추상적인 상상력을 발휘하는 동안 밀착된 신체의 파편들은 흐릿한 파란색을 뚫고 윤곽을 조금씩 드러낸다. “사람 있어요”라는 문장의 지시는, 현실의 서사에서 미끄러져 나와, 노예주의 회화와 결합한 순간 파란 색의 물질 속에 실존하고 있는 인간 형상에 대한 적극적인 출현을 돕는다. 그리고 그것은, 투명한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사람과 사람에 대한 동질성을 환기시킨다. 여기에도 사람이 있다는, 너와 나의 가장 심연의 동질성 말이다. 

   <무고한 당신>, <서로를 지키는 우리는>, <우리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사이를 맴돌던 시선은, 규정할 수 없는 분노와 혐오를 주고 받다가 어떤 “절망”이라는 상황 속에 함께 엮인다. 노예주는 어쩌면 그 절망의 상황에 연대하며 가능한 장소에 서서 여기와 저기, 나와 너 사이의 끝없이 되풀이 되는 “거리”의 문제에 가서 닿아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의 회화 속 현실의 괴물을 향한 각각의 시선은, 폭력의 실체에 다가가지 못한 채 되레 괴물의 이미지를 현실에 지속적으로 투영시켜 놓는다. 

   전시 제목 ‘거친 모래가 뱀의 머리에 닿지 않도록’에는, 혐오와 분노의 폭력적인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사물과 색채에 주목하는, 노예주의 속내가 담겨 있다. 명료하게 분리된 가해와 피해의 자리를 미묘하게 굴절시켜, 그는 쉽게 전복될 수 없는 위계적인 힘의 구조와 혐오의 시선이 만들어내는 괴물들의 실체에서 조금 비껴 서서 그러한 것들로 명명될 수 없는 작은 연대에 주목한다. <서로를 지키는 우리는>에서, 무거운 함성과 어두운 침묵만이 교차하는 시위 현장에서 어린 아이 같은 앳된 얼굴의 동료에게 시선을 돌린 노예주는, 보라색 염색 머리 위에 흐릿하게 올려져 있는 나비 핀을 강조한다. 어쩌면 모든 어둠과 모든 침묵이 저 흐릿함을 밝히기 위한 것처럼, 그는 절망을 가로질러 현실을 지켜내는 소소함과 가벼움에 대해 증언한다. 

   시위 현장에서 일상의 조건을 유지한다는 것, 그것은 절망 앞에서 우는 것만큼 힘겨운 너와 나의 공감으로부터 온다. <균열 없는 혐오>(2024)는, 성매매 집결지 강제 폐쇄에 맞서 거리로 나온 성 노동자들을 향해 거리낌 없이 카메라를 든 누군가의 폭력적인 시선을 보여준다. 타인들이 지켜내고자 하는 일상의 조건을 공감할 수 없다는 저 눈빛은, 무언가를 폭로하겠다는 외침을 담고 있다. 그들의 응시가 바라는 폭로는, 저 경계 너머로 추방되어야 할 무언가가 일상으로 침범해 온다는 (또 다른) 불안에서 기인한다. 노예주는 흑과 백이 교차하는 이 무차별한 폭로 앞에서 절망에 휩싸인 나와 너의 일상을 보려 한다. 

   한 여성 소설가가 현실에서 글을 쓰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 자신의 글쓰기를 절망 앞에서 우는 것과 연결시켰다. 그는“절망은 만져지기 때문이다”라는 문장과 함께 “절망의 기억은 남는다”고 했다. 허구와 상상의 소설 한 가운데, 그가 만졌던 절망의 기억들이 남아 있었을 테다. 노예주는, 가짜 같은, 어쩌면 거짓말 같은, 시위 현장의 촉감을 작은 그림에 담았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철거 용역들을 모순 속에서 기다리며, 난로 위 주전자에 비친 얼굴을 사진 찍고, 귤로 만든 눈사람 모양의 귀여움과 노란 전구를 감싼 두 손의 다정함을 사진 찍어 그림으로 옮겼다. 

   을지로 뒷골목은 차례차례 철거됐고, 시위 현장에서 함께 연대했던 많은 사람들은 쫓겨났다. 장애인 차별 반대 시위는 출퇴근길 발목 묶인 이들에 대한 폭력으로 어처구니 없이 낙인 찍혀 차별을 다시 두텁게 했고, 세상은 투쟁으로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절망을 남겼다. 누군가가 겪(었)을 재난은 금방 잊혀지고 덮어지고 사라진다. 재난 이후, 어쩌면 일상의 공백에서 재난을 기억하며 상상하는 이 일이 그것과 연대할 수 있는 남은 소명일 수 있다. 흐릿한 기억과 허구적 상상을 통해, 사라지고 은폐된 일상의 조건에 가서 닿을 수 있게 하는.

 

_안소연(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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