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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다정함만 있다면

기획: 서다솜, 전그륜

​참여 작가: 김양우, 심흥아, 최수진, 홍도연

2024.10.5 - 10.30

합정지구는 2015년, ‘신생 공간’이라는 새로운 흐름으로 바쁘게 흘러가던 때에 합정역 인근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시간은 합정지구를 더 이상 ‘신생 공간’으로 호명하기 어려울 만큼 흘렀다. 합정지구는 어느새 1년 차 공간이 되었고, 두텁게 누적된 이 시간을 되돌아볼 시점에 서 있다. 하지만 ‘10주년’이라는 거창한 단어 앞에서 자칫하다가 우리가 스스로를 역사의 무덤으로 이끄는 꼴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들통날 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생겼다. 그래서 더욱이 처음부터 하나씩, 새롭게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의 전시와 활동, 글들을 펼쳐보고 합정지구라는 공간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우리가 실천하고자 했던 ‘미술’은 어디로 향하는 여정이었는지 살펴보고자 했다.

지금까지 합정지구는 미술이 다른 이를 만나고 서로의 안녕을 주고받을 수 있는 만남의 장소이기를 바라며, 그 과정을 매개하는 플랫폼이고자 했다. 우리의 일상이 예술이라는 거대한 세계에 잠식되지 않고 현실의 감각을 생생하게 되새길 수 있기를, 쉽게 놓치고 지나칠 수 있는 우리 주변의 사사로운 이야기를 서로에게 일깨워 줄 수 있기를 바랐다. 10년에 걸쳐 모은 기록을 펼쳐놓은 위로 미술이 나와 우리 주변을 돌보는 일이 되기를 지향했던 시간이 떠올랐다. 그리고 여전히 그러하기를 바라며, 10주년을 맞이하는 이 전시의 키워드를 ‘돌봄’으로 삼아본다. ‘돌봄’은 사적일 수도 있지만 사회적이기도 정치적이기도 하다. 어떤 말, 어떤 담론과도 얽힐 수 있으며,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도망칠 수도 있다. 어쩌면 이러한 속성마저 합정지구와 닮아 있을지 모르겠다.

이 전시 《이런 다정함만 있다면》은 합정지구가 ‘돌봄’이라는 키워드 아래 새겨온 10년의 기록을 재구성해 보는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두 명의 기획자는 합정지구의 기록을 ‘아카이빙’한다. 조금 뻔한 방식이기도 하지만 지난 시간을 더듬어보기 위해서 아카이브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저 선형적 시간을 따라 지금까지의 기록물을 단순히 박제하기보다는 그동안 해온 전시와 활동이 ‘돌봄’의 서사로 읽힐 수 있도록 재구성하였다. 이전에는 시도해 보지 않았던 이름을 지어보기도 하며 명사로 제한되는 라벨링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 세계에 유의미한 작동이 될 수 있는 이야기를 써내리고자 했다. 그리고 합정지구와 함께 전시를 꾸렸던 작가들 중에서 ‘돌봄’의 관점에서 조명할 수 있는 4명의 작가와 다시 만났다. 우리와 함께했던 시점으로부터 우리는 또 어떤 다른 모습으로 만날 수 있을지 지금 이곳에서 하나의 풍경으로 그려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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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진이 2017년 개최한 개인전 《무지개 숨 제작소》는 작가에게는 일상이기도 한 ‘그리는 일’에 상상력을 더하여, 이를 돕는 다른 세계에 대한 반짝이는 상상력을 펼쳐 보인 전시였다. 지금까지도 주제와 스타일은 계속해서 변하고 있지만, 여전히 자유롭고 감각적인 색과 형태를 통한 시각적 즐거움이 가득한 회화적 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그가 그려내는 명랑하고도 낭만적인 풍경은 어쩌면 현실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대체로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주변의 가까운 관계로부터 소재를 얻거나 일상 풍경 속 반짝이는 찰나를 포착한 것들이다. 일상에 드리워진 권태라는 장막을 걷어내면, 들꽃은 폭죽처럼 피어 오르고 둥그런 얼굴들은 제멋대로 늘어져 하나의 운율이 된다.  선명한 색채와 생생한 물성, 그리고 발랄한 상상력이 캔버스 위로 미끄러지고 뒤엉키며 지금 이 순간을 붙잡는다. 오늘을 살피는 살뜰한 시선 끝에서 일상의 사소한 장면이 이전에 상상해 본 적 없는 세계로 도약한다. 그래서 그에게 ‘그리는 일’은 자기 자신과 일상을 돌보는 일에 아주 가깝게 맞닿아 있다. 반복되는 매일의 한 장면도 어느 순간 유쾌한 동화가 되며, 무덤덤하게 흘려보낼 수 있는 추상적인 감각이 각자의 몸과 결을 얻고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홍도연은 2020년 기획전 《그리는, 시간》에서 드로잉을 장르로 삼아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는 작품을 선보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각각 고양이와 상괭이가 주인공이 되는 두 편의 드로잉 무빙 이미지, 〈나의 사랑, 산초〉(2021)와 〈상괭이 시그널〉(2023)로 함께한다. 두 작업 모두 연필, 목탄 등으로 그린 후, 이를 지우고 그다음 장면을 새로 그리며 다른 모양으로 나아가는 방법으로 구현된다. 〈나의 사랑, 산초〉에서는 작가가 산청군에 위치한 레지던시에서 우연히 만난 고양이 ‘산초’의 모습 위로 풀숲이 돋거나 나뭇잎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산초’는 풍경으로부터 나타나거나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상괭이 시그널〉에는 바다를 헤엄치는 상괭이와 그로부터 퍼지는 파동이 흔적을 남기며 소리도 없이 잔잔히 퍼져나가는 장면이 이어진다. 홍도연의 그리기는 지난할 수도 있을 만큼 꾸준히, 그리고 가장 소박한 방식으로 계속해서 번져나간다. 그렇게 시선 끝에 닿은 대상을 살피고 아끼는 마음이 한 장의 종이 위에 켜켜이 쌓여간다. 아무리 지워내도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던 처음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건, 그만큼 꼭꼭 눌러쓴 마음이 그곳에 남아있다는 의미다. 그렇게 그의 작품에는 선과 선이 만나고 이별하는 일이 반복되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의 궤적이 새겨진다.

김양우가 2022년 개최했던 개인전 《통근 생활》은 ‘통근’이라는 소재를 통해 사회가 규정한 이동 범위 안에서 하루를 겨우 버티는 오늘의 모습을 담아내고 일상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결핍과 균열을 발견하는 전시였다.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은 고려인의 삶을 주목한 〈이주 프로젝트〉 중, 〈조금씩 조금씩 산다〉(2021)와 〈바스토베 언덕〉(2021)을 선보인다. 〈조금씩 조금씩 산다〉는 위성 지도를 통해 고려인의 강제 이주 경로를 바라보는 것을 시작으로 점차 그들의 일상에 가깝게 다가가며 고려인들의 역사와 삶을 비추어본다. 〈바스토베 언덕〉은 강제 이주 당했던 고려인들의 무덤이 모여있는 장소로, 작가는 그곳에서 투박하고 녹슨 철판 위 아프게 새겨진 그들의 이름 위로 마른 바람이 스치는 풍경을 담담하게 담아냈다. 김양우의 방법론은 ‘함께하는 것’에 있다. 이방인으로 여겨지는 타인과 긴 호흡으로 함께하고 느슨하게 연결되며 희로애락을 함께 나눈다. 돌봄이란 단어가 때로는 일방적인 관계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돌봄은 하나의 연대를 이룬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방인이면서도 기꺼이 함께 자리하고 서로에게 주어진 삶의 이야기를 나눈다. 이곳에서 돌봄은 무거운 책무가 아니라 각자의 아픔과 진심을 나누어들며 함께하는 일이 된다.

심흥아는 합정지구가 문을 열었던 2015년 개인전 《손바닥 마인드》를 개최했다. 그의 만화에 담긴 소박하고 간결한 고백은 진심에 가깝게 닿는다. 또한 특별히 선별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대부분 ‘돌봄’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가 그간 출간한 만화책 11권을 비치하여 다양한 차원에서 ‘돌봄’을 살필 수 있도록 한다(그가 남편이자 동료 만화가인 우영민과 함께 그린 작품은 ‘심우도’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만화의 발화자는 주제의식을 웅변하거나 특별한 사건을 말하기보다 평범한 삶을 담백하게 읊조린다. 잔잔한 하루 중 예기치 못한 투쟁이 벌어지기도 하고, 치열한 어제를 보내면 오늘은 또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격정이 사그라들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허구로 읽히기보다는 우리 삶의 어느 단편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서 말하는 ‘돌봄’은 소재주의적으로 낭만화되지 않고 현실적인 문제와 뒤엉킨다. 그 관계망에서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필연적으로 받아온 돌봄을 떠올리고, 앞으로 나누어야 할 돌봄을 고민하게 된다. 묵인하고 외면했던 돌봄의 가치를 그리며, 돌보고 돌봄 받으며 세상에 위치 지어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런 다정함만 있다면》은 이 지구에서 버티고 견디느라 미처 돌보지 못하고 흘러가버린 시간을 다시 살피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존재에 대해서는 그 의미를 쉽게 간과하거나 살피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미술을 하면서도, 미술 공간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무엇을 위해서 미술을 하는지, 심지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도 종종 잊게 된다. 오래 쌓인 기록을 살피면서 이곳에서 얽힌 수많은 만남이 모두 서로를 돌보는 실천이었다는 점을 새삼스레, 그리고 이제서야 발견한다. 그리고 함께 전시에 참여하는 4명의 작가들의 작업을 통해서 미술은 일상을 다독이는 손길로부터 주변을 향하는 지극한 시선으로부터 시작하고 완성된다는 점을 다시금 확인한다. 비단 이 전시를 함께하는 4명의 작가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순간에는 돌보는 손길과 살피는 시선, 그런 다정함이 함께했다. 《이런 다정함만 있다면》은 그런 마음이 모여 서로를 지탱해온 어제를 떠올리며, 그런 마음이 모여 만들어 낼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기꺼이 꿈꾸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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